멍 하나

by 임기헌

보통 새벽2~3시 즈음 잠이 든다. 가게 일을 마친 뒤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밤10시, 씻고 책 원고나 기고 칼럼을 쓰다보면 새벽1시, 그리고나서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책을 읽고 넷플릭스를 보다가 주로 잠이 드는데, 새벽3시가 된다.


아침은 보통 알람을 맞춰놓지 않아도 7시가 되면 기가 막히게 눈이 떠진다. 바로 TV를 켜고 아침 뉴스와 인간극장 같은 사람냄새 나는 프로그램에 채널을 맞춰 놓는다. 보는 둥 마는 둥이지만. 그렇게 8시가 되면 씻고 다시 가게로 출근을 한다. 시간이 조금 이르다 싶으면 산책을 하는 경우도 있고, 커피숍에서 번역 작업을 하거나 도서관에 들려 책을 읽다가 출근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어제는 깊은 꿈을 꿨다.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생각나지 않았던, 젊은 날의 내 사랑 그녀가 꿈속에 등장을 했다.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같은 집에서 평온한 하루를 보내다가 특별한 사건도 없이 꿈은 그녀와 함께 달아나버렸지만.


새벽5시. 다시 잠을 청하기엔 글러먹은 것 같아 롱패딩을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40분 거리에 있는 영덕 바닷가로 향했다. 동트는 바다를 보고 싶었다. 도착할 무렵엔 지구의 자전이 내가 생각한 속도보다 빨라서인지, 이미 해가 저만치 떠올라 있어 지평선에 걸쳐 있는 태양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국밥집에 들려 아침을 여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막걸리 한잔이 생각났다. 운전을 해야되는 바람에 그러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대신에 선택한 편의점의 커피 한잔. 따뜻한 커피를 두 손에 움켜쥐고 바닷가 주변을 한바퀴 걸었다.


’멍 하나‘다. 가슴 한 켠에 응어리진 작은 멍 하나가 여전히 씻기지 않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유년 시절의 기억까지 끄집어내어 거슬러 올라가 봤다.


첫사랑? 아니다. 지금은 그녀의 이름 조차도 생각나질 않는다. 철딱서니 없던 서로의 이해관계 때문에 원치 않았던 임신 중절 수술을 한 뒤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가버린 그 친구는 어떨까. 아무렴, 태평양을 건너간 이 후 단 한 번도 그리워한 적이 없다. 투병하시며 너무 아프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해서일까, 아닌 걸, 이제는 납골당에 가는 횟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차츰차츰 무뎌지고 있으니까. 그럼 이혼을 한 전처와 너무도 다정했던 처갓집 식구들에 관한 죄책감일까. 아니다, 야박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결단코 아니다.


그럼 뭘까. 이 멍 하나. 잊을만하면 통증이 재발하는 이 작은 멍 하나. 그리움을 작은 단위로 역산해봐도 그 어디에서도 찾지를 못하는 걸. 30대를 지나온 어딘가에서 새겨진 이 작은 멍 자국.


꽁꽁 숨어있는 그 무언가에 얽히고 긁혀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소개팅을 하거나 어느 모임 자리에서 쉬이 만나게 된 고운 사람들도 그 멍 하나 때문에 떠나보내게 된다. 섹스까지 하고 난 뒤에는 ”우리 사귀자“라는 절차가 으레 필요할텐데 나는 한 달이 지나도 아무 말을 안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그 사이에 있는 누군가로부터 ”너는 한 번 잘려고 쟤 만났냐?“ 하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나는 그게 아닌데, 그게 맞게 된거다.


”일어났어?“, ”밥 먹었어?“ 하는 의례적인 대화법도 따분하고, 설사 이 모든 게 매끄럽게 진행이 되더라도 ’결혼‘ 이야기가 나올까봐 애초에 연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그냥 퇴근 후 술한잔 하고, 같이 영화보고, 햇살 좋은 날 여행 다니고, 그러면 안될까. 아차, 이게 사귀는 건가? 싶기도 하고. 무튼 멍 하나 때문에 온통 모순 덩어리가 됐다.


코알라가 되고 싶다. 짝짓기 상대에게 퇴짜를 맞은 뒤 아무렇지 않듯 제 집으로 돌아가 20시간 동안이나 그대로 잠만 자는, 깬 뒤에는 유칼립투스 잎을 맛있게 먹는, 그 녀석을 닮고 싶다.


반복되는 하루를 버텨내다가 때로는 해외나 사람들 발길이 잘 닿지않는 섬을 찾아 그곳에 일주일 혹은 한달 가량을 머문다. 내 마음 속의 집으로 돌아가는 거다. ’멍 하나 즈음이야‘ 하는 생각으로, 동지섣달에 핀 꽃들이 만발한 그곳으로.


바다와 돌고래를 가족으로 여기며 살아가던 그랑블루의 소년은 어른이 된 후 고백한다. ’2년 전에는 그녀를 위해 죽을 수도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이름조차 생각나질 않아.‘


지워지지 않는 내 마음속의 작은 멍 하나도 그와 같을거다. 유약함, 결핍, 황폐, 조자룡의 헌 칼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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