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와 누나는 요즘도 가끔 그런다. 내가 결혼 생활은 실패 했지만, 아이라도 한명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아이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핏덩이 때 조카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지갑 한켠에 고이 넣어 다닌다. 그리고 가끔 고단할 때면 하늘이나 바다를 바라보며 조카들과 아버지가 담긴 사진도 함께 꺼내보곤 한다.
내 나이 마흔둘. 1982년생 개띠. 12월31일 생이라 두어시간만 더 늦게 태어났으면 한 살을 더 아낄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안고 오늘도 숨비 소리를 내며 살아간다.
재혼은 포기 했다기 보다는, 나이와 현실에 가로막혀 포기를 당하게 되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할수 있다'라는 위로는 미안하지만 이젠 공허한 메아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학생한테 "넌 서울대 갈수 있어!"라고 하는 메아리와 결이 같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들의 반복되는 메아리에 질색이 나서, 나는 가끔은 직접 현실적 대안을 그려보곤 한다. 입양은 어떨까 싶은거다. 과거 어느 다큐를 보며 비혼주의자인 한 여성이 아이 둘을 갓난 아기 때부터 입양을 해서 키우는 모습을 봤다. 그 아이들은 어느새 고등학생이 됐고, 입양아란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여느 엄마와 딸아이처럼 맑게 지내는 터였다.
내 핏줄이 아니라면 거부감부터 들던 내가, 이젠 이런 생각까지 드는 이유는 뭘까 싶다. 얼마전 집 베란다에서 상추 모종을 사서 수일을 키우며 결실을 봤다. 신기했다.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하니 완전한 그 무언가가 되는 모습이.
살아가는 동안 단 한번만이라도 내 아이를 마주할 수 있고, 그 아이를 정성을 다해 키운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나는 그 기분이 참 궁금할 뿐이다. 그래서 '입양'이라는 고귀한 행위에 나 따위가 해서는 가당치도 않을 상상을 해보게 됐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다 자란 나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드실까. 우리 아버지 시계는 내 나이 서른셋에 정확히 멈춰버렸는데.
사람이 가꾼 채소나 저절로 난 나물 따위를 우리는 '푸성귀'라 부른다. 그 나물을 꺾어 책 속에 집어넣으면 말라서 책갈피로 변하게 된다. 그러면 그 잎사귀는 영원히 시들지 않게 되는데, 그걸 일본에서는 '오시바나(おしばな)'라 부른다. '푸성귀'가 '오시바나'로 변하는 과정이다.
푸성귀 사랑과 오시바나의 마음이 그리운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