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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기헌 May 14. 2023

푸성귀 사랑과 오시바나의 마음

우리 엄마와 누나는 요즘도 가끔 그런다. 내가 결혼 생활은 실패 했지만, 아이라도 한명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아이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핏덩이 때 조카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지갑 한켠에 고이 넣어 다닌다. 그리고 가끔 고단할 때면 하늘이나 바다를 바라보며 조카들과 아버지가 담긴 사진도 함께 꺼내보곤 한다.


내 나이 마흔둘. 1982년생 개띠. 12월31일 생이라 두어시간만 더 늦게 태어났으면 한 살을 더 아낄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안고 오늘도 숨비 소리를 내며 살아간다.


재혼은 포기 했다기 보다는, 나이와 현실에 가로막혀 포기를 당하게 되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할수 있다'라는 위로는 미안하지만 이젠 공허한 메아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학생한테 "넌 서울대 갈수 있어!"라고 하는 메아리와 결이 같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들의 반복되는 메아리에 질색이 나서, 나는 가끔은 직접 현실적 대안을 그려보곤 한다. 입양은 어떨까 싶은거다. 과거 어느 다큐를 보며 비혼주의자인 한 여성이 아이 둘을 갓난 아기 때부터 입양을 해서 키우는 모습을 봤다. 그 아이들은 어느새 고등학생이 됐고, 입양아란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여느 엄마와 딸아이처럼 맑게 지내는 터였다.


내 핏줄이 아니라면 거부감부터 들던 내가, 이젠 이런 생각까지 드는 이유는 뭘까 싶다. 얼마전 집 베란다에서 상추 모종을 사서 수일을 키우며 결실을 봤다. 신기했다.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하니 완전한 그 무언가가 되는 모습이.


살아가는 동안 단 한번만이라도 내 아이를 마주할 수 있고, 그 아이를 정성을 다해 키운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나는 그 기분이 참 궁금할 뿐이다. 그래서 '입양'이라는 고귀한 행위에 나 따위가 해서는 가당치도 않을 상상을 해보게 됐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다 자란 나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드실까. 우리 아버지 시계는 내 나이 서른셋에 정확히 멈춰버렸는데.


사람이 가꾼 채소나 저절로 난 나물 따위를 우리는 '푸성귀'라 부른다. 그 나물을 꺾어 책 속에 집어넣으면 말라서 책갈피로 변하게 된다. 그러면 그 잎사귀는 영원히 시들지 않게 되는데, 그걸 일본에서는 '오시바나(おしばな)'라 부른다. '푸성귀'가 '오시바나'로 변하는 과정이다.


푸성귀 사랑과 오시바나의 마음이 그리운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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