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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경철 Nov 17. 2022

부부란 그런 사이이다

문정희의 '부부' 중에서

가을이니 등산에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10살 첫째는 문제없을 것 같고 6살 둘째가 잘 갈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둘째가 정 힘들어하면 도중에 내려오면 그만 아니냐 하며 집을 나섰다. 정상까지 4km. 등산 초반에 첫째가 걷는 것은 재미없다, 힘들다 하며 징징거렸지만 이내 잘 가더니 먼저 앞서가기까지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행을 온 식구는 많이 보였지만 둘째만큼 어린아이는 보이지 않아서인지 둘째가 폴짝거리며 산을 오르는 모습은 단연 눈에 띄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감탄 섞인 응원 덕분인지 둘째 역시 씩씩하게 산을 올랐다. 


드디어 정상. 싸온 김밥을 먹고 배가 부르자 아이들이 눕고 싶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자리와 무릎을 내주었다. 힘들게 올라와서 배부르게 먹고 누워 있는 아이들의 얼굴은 만족감이 가득했다. 반면 남편의 얼굴은 핼쑥했다. 남편의 내려가는 모습을 보니 발이 허공에 있을 때 떠는 것이 보였다. 다리에 힘이 빠져 내 다리 같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날 밤 누워서는 앓는 소리를 했다. 등과 어깨까지 아프다고 했다. 그러니까 평소에 운동을 좀 했어야지. 그렇게 벌써부터 체력이 떨어져서 어떻게 할 거냐며 타박을 주며 내려갈 때 다리를 떠는 모습을 흉내 내며 놀렸다. 


남편은 그날 밤 침대에 눕자마자 코를 골아댔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신경 쓰이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코를 골아야 신경을 쓰는 사이가 된 것이 신기하다. 결혼 전에는 몰랐다. 수줍어하고 두근거리던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면 이런 사이가 되는 줄.  


부부

                                      문정희

    

부부란 여름날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도

어둠 속에서 양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나머지를 어디다 바를까 주저하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함께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 보는 사이이다     


서로를 묶는 것이 거미줄인지

쇠사슬이지는 알지 못하지만

부부란 서로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오도 가도 못한 채

죄 없는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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