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사무실 복도에 들어서니 앞에 경비 아저씨가 뒷짐 쥐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일요일 아침이어서 느긋하게 각 층을 순찰하는 모양이다. 뒤에서 “안녕하세요” 했더니 깜짝 놀라신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더구나 일요일 아침에 누군가가 출근하리라는 생각은 못했던 모양이다. 서로 인사를 하고 경비는 내 방문 앞에 있는 화분을 바라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이거, 청소하는 아줌마가 안 치우고 뭐 하는지 모르겠네.” 하신다. 나는 질겁했다.
창가에 있는 화분 다섯 개는 내가 관리하는 화분이다. 좋은 나무는 아니고 집에서 아내가 키우고 있는 화분 중에서 잘 죽지 않을 것으로 추천받은 것을 가져다 놓았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신경을 많이 썼다. 작은 화분이라 방심하고 2, 3일만 물을 거르면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부터서다. 의사 표현을 전혀 못 하는 식물이지만 순전히 내 잘못으로 남의 생을 회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은근한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 며칠 사무실을 비울 일이 생기면 아내에게 꼭 부탁해서 물을 주도록 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가을이 되고 낙엽이 질 무렵이면 하나둘 떨어지는 잎을 모아서 화분 밑에 골고루 모아 놓는 게 좋았다. 내가 뭐 특별하게 감성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가을에 떨어져 구르는 낙엽을 잠시라도 모아 놓는 것이 그냥 좋았을 뿐이다. 아니 그것보다 낙엽이라는 일반 명사에 조금 덧칠해서 가을이란 추상적 환상을 연출하고 싶은 값싼 호사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오늘 아침에 쓰레기로 분류되고 그에 그치는 게 아니라 직무 태만으로 죄 없는 청소 아줌마가 곤란할 것 같은 사건으로 번지게 되었으니 내가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더듬거리며 그 사정을 설명하는 데 상당히 걸렸다. 그리고 나 이외의 관계에서 느끼는 상반된 감성에 대한 거의 시름 같은 이질감을 느꼈다. 내 낭만이 꼭 다른 사람의 낭만으로 공유될 수 없다는 그 막막함이라니.
우리 아파트와 결 아파트 사이에는 2차선 도로 정도의 공간이 있다. 사람들만 통행하는 길이다. 입주한 지 이십 년이 넘어가자 거기에 심어 놓은 나무들이 우거져 작은 숲을 이뤘다.
가을에 나무의 잎이 떨어지면 그 길은 환상적인 모습으로 변한다. 청소하시는 분들이 의도적으로 치우지 않는지 낙엽길은 쌓인 낙엽으로 정말 폭신할 정도의 아름다운 길이 된다. 밟으면 발목까지 빠질 것 같은 그 길을 손주들 손 잡고 걷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가을 내내 종이나 눈에 거슬리는 쓰레기만 치워버린 그 길은 눈이 소복하게 쌓일 때까지 그대로 둔다. 그걸 낭만이라고 해도 될지는 몰라도 나는 그 길이 정말 좋았다.
핑계만 생기면 나는 아는 사람을 불러서 그 길을 자랑하고 그들도 나처럼 감탄할 때까지 식당으로 모시고 가서 술을 마시곤 했었다. 그 술자리는 보통 길어지기 마련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같이 마시는 사람이 내 기분에 쉽게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도 좋다는 건 인정하지만 나 같이 감탄하지는 않는다. 가장 큰 이유가 그들에게는 그들이 아니라 남의 집 일이기 때문이지 싶었다.
그런데 5년 전 즈음의 어느 날, 어린아이들은 보듬을 수도 없을 정도로 자란 나무들을 듬성듬성 몇만 남기고 다 베어버리고 그 밑에 화단을 만들었다.
누가? 구청 직원들이다. 나는 정말 분개했다. 나무 밑동을 벤 공무원의 직도 그렇게 베어버리겠다고 고래고함을 질렀다.
구청에 항의라도 했냐고? 술이 깨면 나는 양 같이 순한 사람이다. 단지 나는 그 5년이 지나는 동안 그 길을 한 번도 지나가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 아파트에서 조금만 가면 행신역이다. 그 행신역에서 강매역까지는 환상적인 산책로가 있다. 나무들이 우거진 그 밑을 걷노라면 원시림 속을 걷는 기분이다.
나는 오후에 그 길을 걷는다. 나 말고도 많은 시민이 그 길을 함께 걷는다. 그들도 나처럼 그 길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 길을 걷노라면 우리 아파트 결에서 사라져 버린 그 숲길이 생각난다. 물론 행신역 옆의 그 길도 아파트 단지가 생기면서 새로 만든 숲길이고 똑같이 덕양구청 담당이다. 그 말은 구청에서 마음만 먹으면 그 길도 아무 때나 나무를 다 베에 버리고 화단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도 된다.
공무원의 정서가 시민의 정서와 맥이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험은 통렬한 아픔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공무 집행은 주민의 의사 수렴을 꼭 거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아픔 중에 포함되어 있다.
나는 이 일요일 아침에 할 일도 없이 사무실에 나와서 내 가치가 뭉개지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 더해서 5년이나 묵은 트라우마까지 소환하고 있다.
그 아픔은 다 내 몫이라는 건 알지만, 항상 그렇듯이 나만 손해 본 것 같은 상실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 그게 불만이다. 가을이 다 갈 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