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피는 꽃은 그리 많지 않다.
항상 너그러운 연꽃, 접시꽃 당신, 울 밑에선 봉선화, 달력을 잘못 보고 피어버린 코스모스, 그리고 능소화가 생각난다.
능소화는 넝쿨은 길지만, 벽이나 담장을 움켜쥐고 올라가지는 않는다. 속없이 키만 늘씬한 것이 능수버들처럼 담장 밖에까지 고개를 내밀고 흔들거린다. 그리곤 그 긴 마디 마디에 노랑이 짙게 밴 붉은 꽃을 피운다. 색이 참으로 화려하고 밝다.
그러나 밝다는 느낌은 생각 없이 지나칠 때의 느낌이다. 오가며 며칠만 능소화를 바라보면 그들의 생이 꼭 그렇게 밝다고만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끝은 의외로 허망하다. 능소화는 시나브로 지는 일이 없다. 개화되어 만개하면 외로울 적마다 한 이파리씩 떨어트려 스러지는 생을 애도하는 목련과는 다르다. 임 떠나 스산한 바람에 흩날리는 꽃 비늘이 되어 파르르 팔랑거리며 떨어져도, 뒤에 그보다 더 많이 남은 망울들이 있어 쇠락을 전혀 느낄 수도 없는 벚꽃하고도 다르다.
능소화는 멀쩡하고 싱싱하든 꽃이, 문자 한 통에 해고되는 비정규직처럼 한순간에 낙화(落花)되어 땅바닥에 뒹군다.
뎅겅 떨어진 낙화가 되어서도 자신의 처지를 미처 깨닫지 못한 듯 멀쩡한 얼굴로 가지에 매달려 실바람에 무연하게 흔들리는 형제들을 맑은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마음 짠하다.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저 철딱서니 없는 서러움이라니·····.
오래전에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으로 출근했었던 때가 생각난다.
아침에는 강변북로에서 서강대교를 넘는다. 저녁에는 서강대교에서 강변북로에 접근하기가 복잡해서 서강대교 앞에서 좌회전해서 국회 뒤를 따라가다 올림픽대로로 올라온다. 올림픽대로의 성산대교에서 가양대교 사이에는 강 쪽으로 작은 키의 나무들이 울타리처럼 자라고 있었다. 여름이면 그것들은 칠칠찮은 여편네의 시기 놓친 파마머리처럼 정신없이 얽혀들 있다.
그 잡초인 듯 무성한 나무들 틈에 어쩌자고 능소화가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항상, 달려가는 차에 의해 생기는 심한 바람에 시달려도 능소화는 꽃을 피운다. 가드레일을 붙잡을 손도 없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심하게 흔들려 어지러워하면서도 결국 몇 송이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리고 능소화답게 어느 순간 꽃을 통째로 떨어트리겠지만 그 시신은 땅에 채 닿기도 전에 광풍에 휘둘려 냄새나는 한강에 수장되고 마는 것 같다. 나는 그 모습을 차를 몰고 지날 때마다, 커다란 추를 단 낚시가 떨어지며 만들어 놓은 동그란 파문처럼 점점 넓어져 가는 아릿한 아픔을 느끼곤 했었다.
그러다 딱 이맘때의 어느 날 나는 그들의 모습이 깡그리 사라진 사실에 가슴이 철렁했다. 한강 주위를 정리하는 인부의 예초기 날에, 항상 힘에 겨워하던 능소화까지 잘려 나간 것이다. 어차피 여름이 가면 작별하게 될, 그 손도 없는 팔을 무참하게 잘라버리다니·····. 무참의 극이었다.
그다음 해부터는 가드레일 위로 춤추듯 흔들거리는 능소화를 보지 못했다. 나도 그들의 팔목이 잘려 나간 얼마 후, 그들처럼 현실의 비정한 칼날을 피하지 못해 직원들에게 죄송하다는 말만 남기고 여의도에서 퇴출당했기 때문이다. 그라나 이때쯤이면 황상 가드레일 위에 정신없이 흔들거리던 그 능소화를 생각하게 된다.
능소화의 꽃말이 무엇인지를 알아봐야 할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을 지금은 어디에 가면 볼 수 있는지도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