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 지 2주 만에 프러포즈를 한 남자친구가 주말에 놀러 가자고 제안했다. 산청에 남자친구 부모님 소유의 작은 집이 있다고 했다. 남자친구의 부모님이 주말에 쉬려고 구입한 집이라고 했다.
10월 어느 토요일 오전,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남자친구를 만났다. 남자친구는 기타를 메고 왔다. 우리는 시외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3시간 반 동안 고속도로를 달렸다. 산청 터미널에 도착해 하나로마트에서 장을 보고 택시를 탔다. 택시는 국도를 달리다가 산길을 올라 어느 전원주택 마을 입구에 우리를 내려줬다. 마을에는 편의점은커녕, 어떤 가게도, 슈퍼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집마다 예쁜 정원이 있었다.
여러 집을 지나 남자친구의 시골집에 도착했다. 허리 높이의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작은 정원과 집이 보였다. 나무문 왼쪽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보리수나무와 벚나무, 잔디밭과 작은 밭이 있었다. 10월이라 나뭇잎은 주황, 노랑으로 색을 바꾸고 있었고 마당에 잔디도 살짝 노래지고 있었다.
3살부터 도시의 아파트에서만 살았다.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기도 해서 계절을 느끼지 못하고 지냈다. 나에게는 학교나 직장에 가는 길이 추우면 겨울이었고, 더우면 여름이었다. 계절을 모르고 살아온 나에게 이 정원은 ‘지금이 바로 가을’이라고 강력하게 알려 주었다.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고, 이곳이 좋았다.
집은 커다란 거실 하나, 침실 2개, 나무로 불을 때는 온돌방 하나, 침실 위에 복층 방 둘, 화장실 하나, 주방으로 되어 있었다. 한 복층 방은 서재였고, 다른 복층 방은 창고였다. 서재에서 책 구경을 했다. 남자친구와 남자친구 아버지가 읽었던 책들이 꽂혀 있었다. 한 침실의 붙박이 장에는 이불이 있었고, 다른 침실에는 키보드가 있었다. 우리는 비틀스를 즉흥으로 연주했다. 남자친구는 기타를, 나는 키보드를 연주했다. 남자친구와 함께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니 좋았다.
그날 저녁은 테라스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하늘을 보았다. 도시와 다르게 별들이 선명했다. 과장해서 별이 주먹만 했다. 은하수도 보였다.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빽빽한 도시에서 빽빽한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 일상을 보냈는데, 이렇게 산이, 하늘이, 별이 가까이에 있다니. 악기를 함께 연주할 수 있고 책을 같이 읽을 수 있는 남자가 옆에 있다니. 그런데 이 남자와 결혼을 할 거라니.
/
서울에 돌아와서 며칠 후 남자친구가 물었다.
“우리 결혼하면 어디에 살까?”
“그러게. 어디에 사는 게 좋을까?”
“계속 수도권에 살아도 되고, 아빠 법무사 사무소가 있는 성주에 가서 살 수도 있고. 산청집에 가도 되고.”
“넌 어디에 살고 싶어?”
“난 아무 데나.”
“나는 산청!”
남자친구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도권에 살든, 성주에 살든, 산청에 살든 상관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산청에서 살기로 했다.
12월 어느 날, 결혼식을 하고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우리는 짐을 정리해서 산청으로 내려갔다.
산청으로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어 아기가 생긴 걸 알게 되었다. 이렇게 산청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