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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작북작 Nov 07. 2023

#9. 산중일상

엄마는 어릴 때 나쁜 아이였어



“앗! 지금 몇 시야!”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혹시 내가 늦잠을 잤나? 지각하면 어쩌지.

익숙하지 않은 천장, 커튼이 눈에 들어왔다. 창밖에는 새소리가 들리고 내 옆에 어떤 남자가 누워 있었다. 아. 남편이지. 아. 나 결혼해서 산청에 내려왔지. 휴~ 다행이다.


결혼하기 전, 서울에 살 때는 6시에 일어나야 했다. 씻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고. 7시에는 집을 출발했다. 1시간 넘게 전철을 타고 학원에 도착해서는 수업을 준비했다. 겨울과 여름에는 방학 특강이 있어서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수업이 시작되었다. 결혼하고 수도권에 계속 있었다면 여전히 그런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남편과 산청에 내려왔다.


산청에서는 바쁘게 지낼 일이 하나도 없었다. 나도 남편도 서둘러 가야 할 직장이 없었다. 우리는 해가 뜰 때 일어나 밥을 지었다. 전기밥솥에 밥을 안치고 멸치 육수를 냈다. 쌈 채소를 씻고 두부구이나 계란프라이, 감자볶음을 만들었다. 멸치 육수로 계란 국이나 된장국, 김칫국을 끓이고 양가 어머니들이 보내주신 반찬을 꺼내면 우리의 아침상은 완성이었다.


30년 넘게 요리를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20살 이후에 자취를 했을 때에도 요리를 하지 않았다. 요리는 내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늘 김밥, 샌드위치, 학교 식당, 편의점을 이용해서 끼니를 때웠다. 집에 있는 날에는 바나나, 계란프라이, 라면, 시리얼, 냉동식품, 레토르트 식품을 먹었다.


그런데 요리라는 것을 처음 해 보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주방 불을 켜 싱크대 앞에서 서는 것부터가 생소했다. 멸치 내장을 떼고, 마늘 껍질, 양파 껍질, 감자 껍질을 까는 것이 낯설었다. 매일 쌀을 씻는 것이, 육수를 내는 것이 참 어색했다. 이런 걸 우리 엄마는 수십 년간 매일 했다는 것에 존경심이 절로 생겼다. 재료를 다듬다 보면 좀 화가 났다. 재료를 만지는 것이 어색하기도 했고, 손에 뭔가가 묻는 느낌도 싫었고, 무엇보다 시간 낭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뚝딱 만들어 놓은 것을 먹고 싶었다. 하지만 산속에는 나와 남편, 둘 뿐이었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 동네에는 식당, 편의점은커녕 슈퍼 하나도 없는 마을이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밥을 해 먹어야 했다.


날마다 밥을 해 먹었다. 요리 실력이 딱히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이것저것을 만들어 먹었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내 마음속에 헛바퀴 도는 듯한 느낌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6 참조) 결혼 전에 나는 내 일을 완벽하게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적성에 맞는 일만 찾아서 노력하면 나는 성공하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20대 내내, 30대 초반이 되어서도 나의 적성을 찾지는 못하고 내 마음은 계속 헛바퀴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요리를 잘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헛바퀴질 하는 느낌이 확실히 줄었다.


산청에 오니 시간이 정말 많았다. 남편도 시부모님도 내가 직장을 갖거나 일을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나도 일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오히려 잘 됐어. 일을 쉬어 보니 시간이 정말 많았다. 나는 종종 동네를 천천히 산책하곤 했다. 산책길에는 때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꽃들과 벌레들,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꽃과 나무들이 있었다. 도시에 살 땐 무심히 보았던 꽃과 나무들을 천천히 익혀나갔다. 그리고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아이들에게 그 꽃, 나무, 벌레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내가 보지 못한 것을 잘도 찾아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기도 하고 갖고 놀기도 했다.


3월이 되면 마당 작은 연못에 개구리를 구경했다. 개구리가 수영하는 모습, 물 밖에 눈을 빼꼼 내미는 모습을 보았다. 개구리알도 채집해서 페트병에 키우기도 했고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며 놀았다. 진달래를 따다가 책에서만 보던 진달래 화전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4월이 되면 아이들과 텃밭에 모종과 씨앗을 심었다. 상추, 깻잎, 방울토마토, 가지, 애호박, 오이... 코딱지만큼 작은 싹이 나는 것도 구경하고 때로 달팽이나 무당벌레를 잡아서 구경하기도 했다.

5월에는 보랏빛 붓꽃과 자주달개비, 닭의장풀을 구경하며 꽃잎을 떼어보기도 하고 세어보며 놀았다.

6월이 되면 정원에 앵두와 오디, 보리수가 열렸다. 달콤 쌉쌀 텁텁한 보리수는 몇 개 따 먹다가  보리수청을 담았다.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마당에서 놀다가 오디와 살구를 따 먹었다.

7월이 되어 날이 더워지면 아이들과 동네 계곡에 갔다. 처음에는 발만 담그다가 점점 용기를 내서 계곡 안에 들어갔다. 다슬기를 잡아 한곳에 모으는 놀이도 하고, 작은 물고기를 잡겠다고 애를 써보기도 했다. 여러 모양의 돌을 주워 오기도 했다.

8월에는 매미 소리가 나는 대나무 숲길을 걸었다. 죽순을 발견하면 발로 밟아 꺾어서 손으로 까며 았다.

9월이 되면 파랗게 핀 나팔꽃을 보며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10월이 되면 금목서, 은목서 향기를 맡으며 석류와 감을 따 먹었다. 빨강 주황으로 물든 감 잎으로 미술놀이를 했다.

겨울엔 집안에서 창밖을 보며 고구마를 구워 먹고, 눈이 오는 날엔 눈놀이를 했다.



아이들과 함께 산속 집에서 살면서 나는 다시 어린 마음이 되었다.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뭔가를 잘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나를 무조건 사랑해 줬다. 자연도 그런 것 같았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연은 무조건 베풀었다. 부모님과 시부모님도 우리에게 무조건 베푸셨다. 아이들과 놀기만 했을 뿐인데 내 마음속 헛바퀴질은 멈추었다.


나는 더 이상 사랑받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그냥 나를, 아이들을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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