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한 복지재단을 통해 후원받는 아동이 후원자에게 20만 원짜리 롱패딩을 요청한 것이 이슈가 되었다. 후원자는 "후원받는 아동이 나를 물주로 본 것 같다. 아이는 피아노도 배우고 있더라. 어려운 가정의 아동이 아닌 것 같다."라는 요지로 후원을 끊었다. 이에 대해 후원자에게 공감하는 사람과 이를 비난하는 논쟁이 불붙었다. 사회복지 쪽에서는 참으로 흔한 이슈이다.
해당 사례는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논쟁의 여지들이 있겠지만, 후원받는 아동이 특정 메이커의 20만 원짜리 롱패딩을 요청했다는 것에 기쁜 마음으로 후원할 후원자가 한국사회에 얼마나 있을까? 현재 한국사회 후원문화의 정확한 현주소를 보여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 사건 이후 그 복지재단은 후원자가 많이 끊어졌으리라 짐작된다.
여러 사회복지단체에서 일해오면서 후원자분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후원자분들은 모두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여유 있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유가 있어서라기보다 선한 일을 하고 싶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으로 어려운 재정을 쪼개서 후원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혼란을 겪게 될 때는 언제인가? 본인이 후원하고 싶은 기관엘 갔는데 기관의 환경이 좋다거나 기관 안에 너무 좋은 전자제품들이 있을 경우이다. 본인이 후원하는 아이들이 너무 예쁘게 생겼을 경우이다. 본인이 후원한 아이가 해외여행을 다녀왔다고 자랑할 경우이다.
후원자의 머릿속에는 어떤 그림이 있다. 그 그림 속의 아이는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그 아이는 부모 없이 허름한 집에 살고 있고
학교의 맨 뒷자리에 앉아서 공부도 따라가지 못하고
맛있는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꿈도 못 꾼다.
나는 그 아이를 도와주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이다.
그 아이는 내가 선물한 후원물품을 받고 너무 기뻐하며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아이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훅 들어온 것이다. 메이커 롱패딩이라니. 피아노 레슨이라니.
롱패딩을 요청한 아이는 11세로 당시 4학년 연말이었고 해가 바뀌면 5학년에 올라가는 아동이다. 친구들이 입은 특정 메이커의 그 롱패딩이 입고 싶을 거고 자기의 욕구가 있다는 것은 당연하고 아주 건강한 일이다. 후원받는 아이들은 왜 본인이 갖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면 안 되는가? (심지어 먼저 얘기한 것이 아니라 물어봐서 얘기한 것인데도 말이다) 후원받는 아이들은 좋은 핸드폰은 쓰면 안 되고 피시방에 가면 안 되고 생필품 외의 물건들은 모두 사치인가?
후원자들이 후원으로 가장 선호하는 물품이 학용품과 생필품이다. 현장의 복지기관들도 학용품은 너무 많이 들어와서 처치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공기청정기를 보내주려고 하는 후원자는 얼마나 될까? 아이들에게 쌀과 학용품은 후원할 수 있지만 공기청정기는 사치품인가? 취약계층 아이들이 이용하는 복지기관이 너무 허름하고 열악하면 그것에 분노를 느껴야 옳지 않은가? 왜 우리의 후원자들은 복지기관이 좋은 물품을 쓰고 좋은 곳에 있으면 후원을 끊는가? 가정의 보호를 받는 아이들은 그것만으로도 다른 것이 필요 없는 아이들일 수 있지만 가정의 보호가 취약한 아이들은 사회가 그 가정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주어야 다른 아이들과 동등한 출발선이 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일하는 단체도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사업을 하다 보니 제일 많이 듣는 얘기가 “우리 아이도 이런 악기는 못 배운다”라는 말이다. 맞다. 악기 가격도 레슨비도 비싸서 나도 우리 자녀들에게 엄두가 나지 않는 교육이다. 하지만 우리 자녀들에게는 언제든 든든히 버팀목이 되어주는 엄마와 아빠가 있지 않은가. 그런 가정의 지지가 약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경험한 아이들이 음악과 악기를 만나 조금이라도 더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긍정적 영향을 받는다면 우리 아이에게는 단순한 취미일지 모르는 이 악기가, 그 아이들에게는 평생 힘들 때마다 위로가 되어주는 의지되는 친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복지기관들도 아이들의 어려운 모습만 노출하고 이를 앞에 내세운다. 후원받는 사람의 자극적인 사진이나 스토리를 노출하여 후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런 자극적인 후원 요청들이 후원자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각인시켰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자극적인 후원요청이 아니면 후원이 들어오지 않는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다른 별에 살고 있는 아이를 후원하는 게 아니라 현재, 한국사회 속에 살고 있는 혹은 이 지구 어딘가에 살고 있는 아이를 후원하는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는 당연히 어떤 욕구가 있을 수 있다. 그 아이도 편하고 넓고 좋은 멋진 집에서 살고 싶고 친구들처럼 에버랜드에 가고 싶고 비싼 옷, 비싼 음식, 예쁜 물건들을 갖고 싶다. 그러한 모든 것을 가져도 그 아이는 건강한 가정 속에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라는 아이들보다 상실감이 크고 희망을 꿈꾸기 어려울 수 있다. 연말 연초 새롭게 후원을 준비하시는 분들은 나의 후원하는 마음을 돌아보자. 나는 어떤 것을 상상하며 후원을 하고 있는가?
복지기관들도 '정말 열악한 한 아이'의 스토리를 부각하여 후원을 받는 모든 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포장하여 후원을 요청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앞의 글에서 언급한 아들이 유튜브에서 보고 후원을 신청했다는 것도, “너무 어려운 아이 사진이 자꾸 나오니까 마음이 불편하더라고. 후원해야 마음이 편할 거 같아서..”라고 후원신청 이유를 얘기했다. 사진을 보기만 해도 저절로 '어이쿠,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자극적 후원요청은 자제해야 한다. 실제로 그렇게 열악한 아이들이 있다면 그건 국가가 반성해야 하고 이 사회의 어떤 시스템이 문제인지 고민해야지 개인의 후원에만 요청할 일은 아닌 것이다.
* 본 글은 사회복지법인 함께걷는아이들 공식블로그와 허프포스트코리아에 실린 글을 보완하여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