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소설을 꽤 좋아했었는데, 어느새부터인가 소설을 잘 안 읽게 된다. 상상, 이입, 공감 이런 감정들은 이제 좀 진부하게 느껴졌다. 재미있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약간의 유희는 있을지언정 사는데 크게 도움이 될까? 오히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거나, 새로운 생각을 얻는 책들이 더 좋아서 그런 비문학들만 즐겨 찾아보곤 했다.
한강작가의 노벨상 소식을 듣고 축하하는 마음과 동시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책 읽는 걸 좋아한다면서 한국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왔는데 그 작가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다니. 그래서 이 기회에 얼른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참에 오랜만에 소설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소년이 온다'는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죽은 중학생 소년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다. 중학생 소년을 관찰하는 친구의 시점에서 시작해서, 같은 고통을 겪고 그 이후에 삶을 살아가는 여러 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장마다 다양한 시점에서 다른 인물의 삶을 보여주지만, 그들은 함께 겪은 하나의 사건이 있고, 그 사건으로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그들이 겪은 고통이, 짓밟힌 영혼이 가슴 아프게 묘사되어 있어 어설프게나마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다큐도 본 적이 있고, 광주에 방문했을 때 518 기념공원, 상무대도 가본 적이 있었다. 관련된 책이나 자료를 찾아 읽어본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시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니 아는 것이랑 느끼는 것이랑 또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무대에서 그들이 겪은 고초나 고문을 설명 들었을 때는 "끔찍했구나" 생각하고는, 지난 일처럼, 남의 일처럼 지나가 버렸었는데, 소설을 통해서 묘사된 감정과 아픔에는 깊이 이입이 됐다. 그들의 슬픔과 고통, 억울함이 생각됐다. 한국의 현대사는 어찌 이렇게 고통스럽고 끔찍한 일들이 많은 것일까.
이게 글의 힘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자료로 접했던 것보다, 더 마음으로 느끼게 해주는 글.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글이라면 가끔 소설을 읽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의 목적이 인간이나 세상에 대한 통찰을 키우는 것이라면, 타인의 고통에 감정을 이입하고 같이 슬퍼하는 것도, 인간을 더 알게 되는 길일 것이다.
좋은 소설을 통해서 조금 더 성장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