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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를 읽고

by root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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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 작가의 『눈물을 마시는 새』를 읽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그의 데뷔작 『드래곤라자』를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항상 난다. 그 당시 나는 『드래곤라자』를 인생 최고의 소설로 꼽았다. 이후 다른 판타지 소설을 계속 접하지는 못하고, 이런저런 다른 소설과 책으로 눈을 돌렸다. 역시 나는 하나를 깊이 파기보다는 이 분야의 걸작을 맛봤으니 다른 분야도 섭렵해 보고 싶은 성격이다. 어릴 때부터 가진 기질인가 보다.


『드래곤라자』는 이영도 작가가 톨킨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쓴 장르 판타지 소설이다. 그 시절 판타지란 거의 모두 톨킨의 세계관이었다. 게임이든 소설이든 엘프, 드워프, 오크, 오우거 같은 종족들이 등장했다. 그래서 나도 판타지는 당연히 그런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몇 편의 작품을 집필한 뒤, 큰마음먹고 자신만의 세계관을 창작해 보기로 하고 쓴 소설이 『눈물을 마시는 새』다. 팬들에게도, 팬이 아닌 독자들에게도 최고의 수작으로 꼽힌다고 한다.


이 정도 상식은 가지고 있었으나, 나이가 들고 보니 판타지 장르 소설은 조금 유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어릴 때 봤으면 모를까, 삶이 바쁜 와중에 그 방대한 분량을 언제 다 읽나 싶어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스토리캠프에 올라온 『드래곤라자』 영상을 봤다. 어릴 때 좋아했던 소설의 내용들이 기억나면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 올라온 『눈물을 마시는 새』 영상의 썸네일을 보곤 ‘아, 이건 읽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역시 읽길 잘했다. 사실 조금 더 빨리, 더 어릴 때 읽었으면 더 감동적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서는 소설의 내용보다는 그 구성의 치밀함과 독자를 매료시키는 요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먼저, 세계관의 치밀함과 그 세계관을 설명해 나가는 방식이다.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로 창조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자신이 창조해 낸 세계에 다른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이다. 세계가 복잡하고 방대할수록 설명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고, 이 과정에서 자칫 지루한 ‘설명충’이 될 가능성이 있다. 잘 쓰인 장르 소설은 치밀하게 창조한 세계관을 독자들이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점점 빠져들게 하는 방식으로 풀어낸다. 그런 면에서 이영도 작가는 치밀하게 세계관을 설계했을 뿐 아니라, 이를 자연스럽게 소설에 녹여 필요한 설정을 적절한 시점에 적절하게 독자에게 보여준다. 독자는 조금씩 그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이런 방식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해리 포터』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이 소설의 특장점은 개연성과 예측 불가능성이다. 얼핏 생각하면 둘은 양립하기 어려워 보인다. 예측하기 어려운 전개와 반전을 만들다 보면 개연성이 파괴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영화 《쏘우》에 대한 비평을 본 적이 있다. 극장 안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결과를 과연 ‘반전’이라 할 수 있느냐는 말이었다. 반전은 적어도 몇 명은 ‘혹시 이런 거 아닐까…?’ 하고 의심할 개연성이 있어야 하는데, 《쏘우》는 그런 개연성이 없는 억지 반전일 뿐이라는 지적이었다. 그런데 이영도 작가는 이 소설에서 두 가지를 모두 완벽하게 구사한다.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예상은 대부분 빗나간다. 언제나 예측하기 어려운 결과가 나타난다. 그러나 곱씹어 보면 치밀한 장치들이 사전에 깔려 있음을 알게 된다.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내가 바보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다음 예상도 또 틀린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이런 과정의 연속이다.


다음으로,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과 사상이다. 이영도 작가는 『드래곤라자』에서도 ‘가을의 마법’이나 ‘하루에 우연히 세 번 만나면 운명’ 같은 소설 속 속담과 용어를 여러 상황에 적용하는 방식을 즐겨 썼다. 이 속담과 용어를 반복해서 접하다 보면 독자 역시 그 관념에 매료되고, 그 관념이 작품 속에서 드러날 때마다 함께 감동을 느끼게 된다. 『눈마새』에서도 같은 방법이 즐겨 쓰인다. 특히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는 말은 처음에는 주인공 일행에게 적용되는 단순한 속담인 줄 알았으나, 점차 쓰임이 확대되며 결국 이 모든 사건이 ‘셋이 하나를 상대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이 드러난다.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는 말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된다. 그리고 셋이 하나를 상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주인공들은 ‘존재의 완전성’과 ‘상대에 대한 관용’을 고민하게 되고, 독자 역시 이 고민을 함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등장인물들이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신념이 있다.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신념이 흔들릴 것 같은 고뇌의 순간에도 끝내 그것을 지키려 한다. 주인공이 상대해야 할 적이든, 잠깐 등장하는 조연이든 신념을 지키려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독자들은 이들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등장인물들에게 애정을 가지게 되면 결국 소설에 빠져들 수밖에 없고, 이들의 행동과 결과에 따라 진한 감동과 여운을 느끼게 된다.


같은 세계관의 후속작인 『피를 마시는 새』를 당장 읽을지는 모르겠다. 당분간은 이 소설이 준 여운으로 충분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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