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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Oct 08. 2021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은?

- 돈이면 다 된다고? 

  대학 다닐 때 이화여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예뻤습니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3년쯤 사귀다 보니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결혼이죠. 그녀는 나를 사랑했지만 내 가난마저 보듬어주지는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는 그녀의 아픔은 신흥재벌 2세가 사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와 비교하면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아주 정말 사소한. 우리는 흐릿한 가로등 아래서 미래에 대한 어떤 약속도 없이 마지막 입맞춤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쓸쓸했습니다. 그녀가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내 가난이 싫었을 뿐이라는 건 핑계일 뿐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결혼하고 나서 그 재벌 2세와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나는 나대로 바쁜 생활로 인해 그녀는 점차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되어갔습니다. 그렇게 10년쯤 지났을 때 우연히 수영장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똥배를 없애려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수영을 시작한 사흘째 되던 날에 그녀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사실 처음 수영을 시작할 때 눈이 나빠 도수가 있는 수경을 샀어야 했는데 도수 없는 수경을 사는 바람에 거의 눈 뜬 장님으로 헤매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바꿔야지 하면서도 천성이 워낙 게을러 며칠 그대로 도수 없는 수경을 쓰고 수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수컷의 본능적인 촉수랄까.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처음에는 수경이 잘 보이지 않아 그게 누군지 알 수 없었죠. 수경을 바꾸고 나서 그 시선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바로 그녀였습니다. 그녀도 내 외모가 워낙 변해서 긴가민가했답니다. 창피했습니다.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그녀. 동물원의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처럼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수영장 안에서 만났으니 볼록 튀어나온 똥배를 가리는 게 대략 난감이었습니다. 아랫배에 힘을 줘도 소용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쪽팔리게 옛사랑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날씬했고, 아름다웠습니다. 우리는 수영을 끝낸 뒤 차를 마시고, 때로는 드라이브도 했습니다. 재벌 2세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에어백 여섯 개가 달린 BMW7 시리즈. 처음 타보았습니다. 그렇게 몇 번 계속 만나다 보니 누구랄 것 없이 옛정이 새록새록 솟아났습니다. 그녀가 나를 떠난 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볼품없는 내 가난이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미운 감정 같은 건 별로 없었습니다.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현실이 그렇게 만들었고, 상황이 그렇게 이끈 것뿐이었으니까요. 현실과 상황으로 인해 십 년 동안 묻혀 있던 사랑의 감정이 마치 화산의 마그마가 솟구치듯 금방 가까워졌습니다. 만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옛사랑은 완전히 복구되었습니다. 행복하고 즐거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나도 가정이 있었으니까요.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건 다른 수많은 여자를 포기해야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항상 선택에는 배제가 따르는 법이니까요. 물론 그녀도 나처럼 고민이 없지는 않았을 겁니다. 문득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스쳐 지나가곤 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한창 일하고 있는데 그녀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여기 회사 건물 앞인데 빨리 내려와.

  혹시 그녀가 남편한테 끌려온 건 아닐까 싶어 눈앞이 아득했습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막막했습니다. 마치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갔습니다. 다행히 그녀의 남편과 함께 온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 표정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뭔가 단단히 결심한 것 같은 눈빛과 꽉 다문 입술. 나는 속으로 결국 때가 왔구나 싶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가 BMW의 트렁크를 열어 보였습니다. 

트렁크 안에는 여행용 가방 두 개 있었습니다. 그녀가 마치 고기의 배를 따듯이 가방의 지퍼를 확 열었습니다. 가방 안에는 100달러짜리 지폐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녀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이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함께 도망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난 그 와중에도 가방 안의 돈이 얼마나 되는지 그 궁금증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전부 얼마야? 

  이십억. 

  그녀에게 그런 제의를 받고 나서 며칠 내내 고민을 했습니다.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친한 친구한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친구는 의외로 쉽게 답을 주더군요. 

  돈만 주고 가라고 그래. 

  고민은 그 뒤로도 한동안 이어졌지만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수영장이니 BMW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고, 자전적 픽션을 통해서 여러분께 묻고 싶었습니다. 

  처음 제목에서 질문했듯이 ‘돈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던데 그런 사랑이 있다면 그런 사랑과 함께 살고 있는 우리는 구원받은 겁니다. 계산해서 팔고 사는 사랑, 참 많습니다.   

  돈으로도 할 수 없는 건, 정말 돈으로도 어쩔 수 없는 건 자신의 운명이 아닐까요? 이미 결정지어진 운명을 거스르다가 비극적 종말을 맞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건 위대한 파멸이 됩니다. 찬란한 빛이 되기도 하죠. 

  오이디프스가 운명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결국은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인 요카스테와 결혼을 하는 비극적 운명을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한 위대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보여줬고, 예수도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인류의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주었습니다. 빅토르 위고가 <노틀담의 곱추>를 쓰게 된 것도 ANAYKH(숙명)이라고 하죠.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의 만남도 운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운명. 사소하게 여겼고,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을 운명은 아무리 많은 돈을 지불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소중한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간과하지 마세요. 운명을 잊고 살면 그때부터는 무인칭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인생, 돈으로 지배되는 게 아니라 운명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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