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

태아시절_ 목적어, 보어, 주어

by 참읽기

명사는 사물의 이름이야. 눈에 보이는 식탁, 의자, 수도꼭지, 물부터 보이지 않는 공기, 바람, 우주 등도 이름이고, 너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있는 용기, 지혜, 정직, 우정, 사랑도 이름이야. 수하? 당연히 수하도 이름이지.

영어에서 뜻을 전하기 위해 말이나 글을 문장으로 만들지. 명사가 자리하는 곳 중 하나가 목적어야. "누가 누구를 무엇한다"라는 문장이 있다면 "누구를"에 해당하는 부분. 행동이 향하는 대상이지.


네가 내 삶에 들어왔어. 아직 얼굴과 얼굴로 만난 게 아니라, 병원에서 흑백 초음파 사진으로만 마주했을 뿐인데, 나는 쉬지 않고 “아가를” 생각했어. “아가를” 그렸고, “아가를” 궁금해했지. “아가에게” 이야기하고, “아가에게” 노래하고, “아가에게” 입힐 옷을 골랐어. 네가 내 삶의 목적이 된 거야.


명사가 자리하는 곳 중에는 보어라는 자리도 있어. "누가 누구다"라는 문장에서 "누구" 부분. “누가”와 “누구”가 같다는 뜻이야. A는 B다. A=B


배가 불러올수록 네가 나의 이유가 되었어. 내가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아가가 먹고 싶은 것, 내가 자고 싶은 게 아니라 아가가 자고 싶은 것, 내가 울고 싶은 게 아니라 아가가 울고 싶은 것이라며 나의 모든 행동을 바로 너와 동일시했지. 변명이 아니었어. 진짜 그렇게 느꼈거든. 내가 너고 네가 나였지.

"나는 엄마다."

이 문장에서 "엄마"는 보어야. 나=엄마. 나는 5년 동안 "엄마"라는 이름을 원했어. 드디어 그걸 얻었어. 배 속에서 너를 품고 있을 때, 나는 이름과 함께 세상을 다 얻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름을 얻는 것은 시작일 뿐이더라.


영어 문장에는 반드시 주어와 동사가 있어. 주어는 문장을 이끌어가는 주인이고, 동사는 그 주인의 행동이야. 앞에서 말한 "누가"가 바로 주어지.


영어에서는 주어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건 명사뿐이야. 다른 단어들도 주인 자리를 너무 갖고 싶어서 명사 모양으로 변신을 해. 동사도 명사 모양으로, 긴 말도 명사구로, 긴 문장도 명사절로, 심지어 질문도 명사절로 변신해. 어떻게든 주인의 위치를 가져보고 싶은 거지. 중요한 건 반드시 명사 모습을 가져야만 주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거야.


너를 만나기 전까지 내 삶의 문장은 늘 내가 주어였어. “내가” 무엇을 했고, “내가” 어디를 갔고, “내가” 누구를 만났지. 뒤에 이어지는 행동은 한없이 다양해도 주인은 “나” 하나뿐이었어.


너를 만나고 문장의 주어가 바뀌었어. “아가가” 움직여, “아가가” 발로 차, “아가가” 딸꾹질해. “아가가” 자. 지금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문장도 너로 가득해. “아가가” 좋아할까? “아가가” 편할까? “아가가” 웃을까?


아쉬우냐고? 아니, 조금도 아쉽지 않아. 여태껏 내 몸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부분들이 너를 위해 펼쳐지고 부풀어 오르고 있어. 내 삶에 그저 그렇다고 느꼈던 순간들이 너에게 유용하게 쓰일 거야. 내가 주인 되어 나만을 위해 살던 때보다, 나는 너를 위한 둥근 집이 되고 네가 주인으로 뛰노는 걸 상상하니 내가 꽤나 괜찮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


네가 나의 목적이다가, 너와 내가 같다고 느끼다가, 마침내 네가 내 인생의 주어가 되어버린 9개월이 어떻게 이리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는지 몰라. 너와 마주하고 살아갈 날들이 더 기대돼.


나는 너를 환영해.

나는 너의 엄마야.

네가 이제 이야기의 주어야. 네가 이끄는 문장 속에서, 나는 너의 엄마로 살아갈게.


수하야, 네가 시작해.

keyword
이전 20화기린악어토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