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의 어린이 中 가을의 어린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새로운 취미와 관심사가 생겨난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내용을 교실에 적용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게 된다. 그 중의 하나가 ‘업사이클링’이었다. 살아 나갈 미래의 시간이 많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이라면 쓰레기, 플라스틱, 환경오염, 기후위기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뤄야 한다. 오히려 어른들과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 중요하고 위급한 문제를 아이들과 풀어나갈 때가 많다. 어른이 되면 하루 벌어 하루 살기 바쁘고 당장 눈앞에 쳐내야 할 문제들이 많아서 그런 거겠지? 하며 의문에 스스로 답을 내려본다. 나에겐 그런 의무감이 있다. 이 아이들이 무언가를 낭비하며 팍팍 쓰고, 아무렇지 않게 식물과 곤충의 모가지를 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말이다. 이왕이면 스스로와 지구에 덜 해로운 선택을 해 나가는 가치의 씨앗을 심어주고 싶다.
그런 마음이 본격적으로 든 건, 쓰레기 문제가 심각해 태평양에 거대한 플라스틱 쓰레기 섬들이 생겼다는 소식과 바다에 표류하는 플라스틱이 미세플라스틱이 되어 사람의 몸에 침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였다. 그날은 하루 종일 ‘병뚜껑’이 내 눈에 거슬렸다. 잘 물든 단풍이 찬란한 광경을 내뿜는 어느 가을날, 아이들과 인근 숲에 가서 산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 떨어진 낙엽들을 밟으며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끼고 있었다.
“선생님, 여기 누가 음료수병 버렸어요!”
유라가 발에 밟힌 플라스틱 음료수 병을 들어보였다.
조금 뒤에는 서율이와 소율이가 낙엽 사이에 숨어있던 작은 비닐 쓰레기를 가져왔다.
“선생님 여기 누가 쓰레기 버렸어요!”
아이들의 계속되는 쓰레기 탐정 놀이에, 이미 가방 속에 많은 짐을 들고 왔던 나는 한숨이 나왔다. 교육상 이 쓰레기를 두고 갈 수도 없고…누가 공원에다 무식하게 쓰레기를 버린 거야?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이 버린 쓰레기를 가져온 비닐봉지에 족족 담았다.
그 날 점심 시간에는 후식으로 빨아먹는 요구르트가 나왔다. 요구르트에는 재활용되지 않는 하얀 플라스틱 병뚜껑이 있었다.
“요구르트 다 먹고 나온 비닐은 이쪽에, 뚜껑은 오른쪽에 모아 넣어주세요.”
유라는 요구르트를 다 먹고도 뚜껑을 가져오지 않았다.
“유라야, 뚜껑도 가져와야지.”
“저 쓸 건데요?”
“어디에?”
“뭐 만들 거예요. 예뻐요.”
딸기우유 빛깔의 뚜껑이 예뻐서였는지 유라는 요구르트 뚜껑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렇게 매력적인 뚜껑이라면 쓰레기로 배출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인터넷에 ‘플라스틱 뚜껑 미술’ 을 검색하면 무궁무진한 활동이 나왔다. 플라스틱 뚜껑을 모으고 분쇄해 업사이클한 '치약짜개', '열쇠고리' 등의 제품도 팔고 있었다. 우선 나는 아이들한테 플라스틱 뚜껑들을 모아 미술 활동 재료로 사용하거나 재밌는 놀이를 해보고자 했다. 가정에 이에 대한 안내문이 나가자 매일 끊임없이 재료가 공급되었다.
“저 또 가져왔어요!”
“어제도 다섯 개 가져왔었잖아, 지율아? 다섯 개까지만 가져오라고 선생님이 말했는데?”
“아니 근데, 집에 많이 있어요. 어쨌든 가지고 왔어요!”
가끔은, 내가 병뚜껑을 가져오라 해서 아이들의 집에서 플라스틱병 음료를 사 먹는 행동을 더 부추기는 게 아닐까 찜찜했다. 그래도 작은 손에 알록달록 병뚜껑을 모아 가져오는 어린이의 마음이 기특했다. 아이들이 가져온 플라스틱 뚜껑은 다양하게 쓰였다. 그것은 물고기 그림의 몸이 되기도 하고, 부엉이 모양이 되기도 하며, 애벌레 그림의 몸통이 되기도 했다. 알까기 놀이의 수단이 되기도, 남은 병뚜껑들은 열쇠고리로 만들어보기도 했다. 병뚜껑 활동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할 즈음 활동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율이는 계속해서 플라스틱 뚜껑을 왕창 가지고 왔다.
“으음, 지율아. 이렇게 모아줘서 고마워. 이제 충분하니까 더 가져오지 않아도 돼!”
“근데 계속 병뚜껑이 생기는데 어떡해요? 그냥 버리면 지구가 아프잖아요.”
“잘 모아두었다가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하면 가져오는 게 어때?”
“그치만 까먹을 수 있잖아요.”
지율이는 어깨를 들썩인다.
“그때 다시 얘기해줄게.”
“근데 지금 집에 몇 개 있는 것도 있는데요?”
“그래, 그것까지만 가져와.”
지율이의 넘치는 열정을 식혀야 했다. 병뚜껑을 가져오려고 일부러 병 음료를 사 먹는 건지도 몰랐다. 수집된 병뚜껑만 해도 포화 상태였다. 나는 이걸 가지고 병뚜껑 분쇄소에라도 가야 하나 생각중이었다.
“그럼 내일까지만 가져올게요!”
그래도 환경을 위해 짬짬이 병뚜껑을 가져오는 지율이의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다음 날 지율이를 마지막으로 병뚜껑 수거는 끝이 났다.
교실에서 많은 병뚜껑이 모이는 걸 보고 아이들과 활동할 재료나 무언가를 선택할 때, 되도록 불필요한 플라스틱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고르려고 한다. 누군가 그건 너의 정신적 만족감을 위해서일 뿐이지 그것 하나 고려한다고 지구에 도움이 되는 영향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어린이와 하는 행동들은 작다. 어린이와 하는 생각들도 작다. 하지만 작고 가시적이지 않다고 해서 아무 의미 없는 건 아니다. 작은 행동과 생각들이 어린이의 마음에 담기면 언제 어떤 계기로 씨앗이 발현될지 모른다. 어린이가 플라스틱 병뚜껑과 지구의 관계를 생각하는 마음은 끈질기고 정성스럽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에는 그런 정성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