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의 어린이 中 여름방학 편
봄이 지나고 초여름의 시간이 흘러간다. 어린이와 북적거리며 정신없이 보내던 나날이 조용해지는 때가 있다. 여름방학이다. 3월부터 어린이와 나는 다사다난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적응기, 갈등기, 조정기…다시 적응기의 반복…어린이가 교실에 익숙해지고 나도 우리 반 아이들의 개성을 파악할 때쯤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온다. 평일 이른 아침 시간에 이렇게 고요한 시간을 맞이한 적이 언제던가? 정신없던 며칠 전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볼에 닿을 때 자연스럽게 내 몸은 깨어난다. 이불안에서 미적대며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원래라면 ‘오늘 놀이 뭐하지?’ 라는 얕은 불안감으로 만원 버스 속에서 핸드폰 검색을 하던 시간이다. 하지만 나는 누워있다. 천천히 일어나 시원한 스파클링을 냉장고에서 꺼낸다. 베란다에서 키우는 식물들을 바라보며 스파클링을 마신다. 다시 시계를 본다. 9시면…등원 맞이하며 가장 힘이 넘치게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지금처럼 멍하니 있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어린이와 함께하는 어른은 본래 신체적 기질이 어떻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상당한 육체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어린이는 생동감이 넘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신체는 움직이고 어린이의 관심은 시시각각 변한다. 책을 보고 미뤘던 집안일을 하며 오전 시간을 보내면 점심시간이 다가온다. 오늘 점심은 밖에서 지인과 먹기로 했다. 외식이라니! 학기 중이라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점심 시간이다. 밥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건 방학이 주는 달콤함이다.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어린이가 없는 어른의 생활로 돌아간다. 단조롭고 정제된 어른의 시간은 많이 웃거나 화낼 일이 없다. 1분 1초를 다투는 급박한 시간도 없다. 사유 할 시간이 생긴다. 빽빽했던 시공간에 점차 여백이 들어선다.
방학일지라도 밖에서도 종종 어린이를 본다. 카페나 식당, 거리에는 종종 어린이가 보인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때도 어린이가 있다. 작은 어린이가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 있으면 계속 신경이 쓰인다. 저렇게 작은 어린이인데 자리를 양보해 주는 어른이 왜 없는 거지? 하며 어린이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을 괜히 쳐다보게 된다. 해 질 녘 한강 공원에 가도 어린이가 있다. 푸른 잔디밭에서 공놀이 하는 어린이…강아지와 놀고 있는 어린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핸드폰 영상을 보는 어린이…부모에게 생떼 부리는 어린이…지나가는 어린이를 나도 모르게 관찰하다 눈이 마주치는 경우가 있다. 멋쩍은 웃음과 함께 “안녕?”이라고 말해본다. 어린이는 생각보다 수줍음이 많아 인사에 반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밤늦게 거리를 걷는 때에도 때때로 어린이가 나타난다. 네발 자전거를 타고 엄마와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어린이,아니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안 잔다고? 그럴때면 늦은 밤을 활보하는 어린이의 수면 시간과 규칙적인 생활 습관이 걱정되는 직업병이 드러난다. 나와 일말의 관련이 없는 지나가는 어린이에게 마음속으로 수많은 참견을 한다. 그러다 문득 우리 반 어린이가 생각난다. 이맘때 길게 해외여행을간다고 한 어린이. 얼굴이 새까매져서 오겠는걸? 채소는 안 먹고 아이스크림, 과자 등 군것질을 너무 좋아하는 어린이. 점심시간마다 급식 지도하기가 참 힘들었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워 아이스크림만 먹는 건 아닐는지. 지하철을 너무 좋아하는 어린이. 방학이 끝나고 만나면 어린이에게 지하철을 타고 어느 역을 다녀왔는지 물어봐야겠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핸드폰 사진첩에 저장되어 있는 우리 반 어린이의 모습을 쭉 훑어본다. 3월에 처음 왔을 때는 완전 아기였군. 7월 말 쯤 되니 아기 티가 벗어나 제법 사람다워졌다. 팔도 다리도 길어진 것 같다. 사진 속 아이들의 표정도 다양해졌다. 찬찬히 사진 속 어린이를 들여다보니 하루가 밭게 지나가는 시간 속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어린이가 언제 웃고 있는지, 어린이와 무엇을 함께 할 때 즐거웠는지.
잠시 어린이가 없는 시간 동안 다시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경험하고 싶었던 것들, 읽고 싶었던 책, 요즘은 글쓰기에 부쩍 관심이 생겨 그에 관한 책을 읽고 싶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짧은 여행 가기, 음악 감상, 한강 산책하기…내 안에 무수히 넓은 지평을 만들어가야 한다. 내 안에 경험의 세계가 다채로워야 어린이와 함께 할 때 하나 씩 꺼내 쓸 수 있다. 어린이와 함께 보낼 기나긴 가을과 겨울을 준비할 수 있다. 그래서 잠시 어린이의 세계와 조금 거리를 둔다. 어른도 어른의 세계가 분명 필요하다. 우린 각자의 세계에서 교류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