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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하고 싶어요!

사계절의 어린이 中 여름의 어린이

by 미미 greenmeme



사람에겐 나의 느낌, 생각, 감정을 말하고 싶은 표현의 욕구가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사회화 기간을 거친 어른은 표현의 욕구를 잠재우거나 조절한다. 특히 직장같이 사회적인 집단 안에서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반면 어린이는 다르다. 어린이는 매 순간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고 들어주길 바란다. 어린이에겐 아직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한 조망수용능력이 충분히 발달되어있지 않다.



어느 여름 날이었다. ‘여름 바다’를 주제로 아이들은 그림을 그렸다. 몇몇 아이들은 캔버스지에 파도의 질감이 느껴지는 물감을 사용했다. 아이들이 그린 작품을 전시만 하기엔 아쉬워 나는 아이들과 모여 앉아 한 명 씩 작품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유라의 그림이구나. 유라는 파란 물감 위에 반짝이 풀로 무엇을 표현한 거니?”


“바다가 반짝이는 거요. 엄마랑 바다 보러 갔을 때 낮이었는데, 바다가 반짝거렸어요.”


유라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작품을 들어 보인다.


“우와 ㅡ 바다가 햇빛에 반짝이는 걸 표현해준 점이 참 멋지다, 그치 얘들아?”


“아니요, 저는 이상해요.”


하진이가 대답한다. 유라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진다. 아이들한테 동의를 구하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이상하다’는 하진이의 대답에 어떻게 되물어볼까 생각하다, 인정하기로 한다.


“아, 이상하다고 생각했구나.”


“네, 저는 이상해요. 왜냐면 너무 반짝반짝해서 바다같지 않아요!”


“야, 너 것도 이상하거든?”


유라의 볼이 빵빵해지며 시뻘게진다. 하진이처럼 여과없이 생각을 말하는 어린이의 표현을 듣고 있자면 당황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유라의 감정도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아니야, 내가 본 바다는 안 그랬어.”


“내가 본 바다는 유라가 그린 바다같아!”


소율이가 하진이에게 말한다. 이내 아이들은 ‘바다’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바다는 원래 반짝반짝한 거야.”


“아냐, 안 그럴 때도 있어.”


“유라는 반짝반짝한 바다를 그렸잖아.”


“우리 엄마가 바다는 하늘 색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했어.”


아이들은 더이상 유라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마음이 상한 유라는 팔짱을 끼고 뾰로통해 있는다.


“너희가 보았던 바다의 모습이 달랐구나. 그런데 앞에 나와서 발표하는 친구가 있을 땐 잘 들어주는 친구가 바다같은 넓은 마음의 친구인 거야. 누가 바다같이 반짝반짝한 친구인지 볼까?”


아이들은 수다 삼매경을 멈추고 재빨리 자세를 고쳐 앉는다. 나는 아이들에게 약속을 상기시켰다. 다음 친구가 발표할 때는 끝까지 듣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손을 들고 말하기로.


하진이의 바다 작품엔 여러가지 색이 가득했다. 하진이는 자기가 생각한 바다 이야기를 열심히 설명한다.


“이게 바다예요. 바다에는 무지개 색이 있어요. 근데 제일 많은 색은 파란색이에요! 근데 바다에는 물고기도 있고…풀도 있고 돌도 있어서 무지개 색인 거예요.”


하진이의 발표가 끝나자 대여섯명의 아이들이 손을 번쩍 든다. 시간 관계 상 모든 아이들의 소감을 들을 순 없었다. 두어명 아이들 소감만 들은 후 다음 발표 차례로 넘어가갔다. 자신의 소감을 이야기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볼멘소리가 나왔다.


“맨날, 나만 안 시켜줘요.”


“맨날 쟤만 얘기해요.”


매번 손을 드는 아이는 대개 정해져 있었다. 하진이, 지율이, 진이 등등…아이들은 이미 여러번 소감을 말했는데도, 한 번이라도 기회가 다른 친구에게 가면 ‘나만 안 시켜’주고 ‘쟤만 얘기한다’는 확증 편향을 가졌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경청의 중요성은 봄의 계절부터 계속 배워왔던 것인데, 여전히 우리 교실에서는 듣기보다 말하기에 경쟁이 붙는다.


“혹시 친구의 작품을 보면서 궁금하거나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충분히 말하지 못한 친구는, 놀이 시간에 선생님한테 와서 이야기해 주세요.”


발표가 끝날 시점, 충분히 말하지 못한 아이들의 볼멘 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지나가는 말로 한 말이었다. 의도와는 달리 발표 시간이 끝나자마자 내 앞에는 아이들이 북적였다.


“선생님! 저 아까 할 말 다 못했어요.”


“선생님, 전 아까 하진이 바다에 왜 무지개가 있는지 궁금했어요.”


“선생님, 주안이가 제 그림 궁금해했었던 것 같은데 맞아요?”


“선생님…”


세상에, 우리 반 아이들은 정말 말하고 싶은 욕구가 크구나…! 조금 당황했지만, 다 같이 있을 때 충분히 들어주지 못한 아이들의 말을 개인적으로 실컷 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명 한 명의 민원을 정성껏 처리한다는 느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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