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의 어린이 中 가을의 어린이
우리 유치원은 초등학교 휘하의 병설유치원이다. 운동장 한편에는 초등학교와 같이 사용하는 작은 텃밭이 있었다. 개중 유치원은 두 줄 정도의 텃밭을 분양받았다. 여름에 그곳에 아이들과 당근, 무 모종을 심었다. 아이들과 바깥 놀이를 나올 때마다 텃밭을 오가며 물도 주고 잘 자라는지 관찰을 했지만, 살뜰히 살피기엔 어려웠다. 가을의 계절이 무르익자, 우리가 심어 놓은 무와 당근잎이 무성해졌다. 아이들과 같이 수확하고, 당근과 무로 간단한 요리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 깍두기나 당근 라페 같은. 그래서 어린이와 오늘의 할 일은 ‘텃밭 작물 수확하기’로 정했다. 나는 아이들을 텃밭으로 데려왔다.
“와ㅡ 이제 우리 당근이랑 무 뽑는 거예요?”
작물을 수확할 거라는 설명에 미솔이가 물어본다.
“응, 오늘 다 뽑아야 해. 더 늦어지면 먹을 수 없게 된대.”
나는 머리로 아이들의 동선을 그려본다. 모든 아이 한꺼번에 수확할 수는 없다. 수확하는 데 도움을 줘야 하고, 아이들 사진도 찍어야 한다. 작물을 놓을 바구니는 어디에 놓을지, 장갑은 어디에 두라고 할지도 고려해야 한다. 도움 주시는 선생님께 부탁하여 기다리는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놀도록 분리했다.
준비는 다 되었다. 나는 성격이 활달한 친구 - 차분한 친구로 짝을 지어 부른다.
“미소와 한솔이 장갑 꼈니? 자, 앞에 있는 당근을 먼저 수확할 거야.”
“수확이 뭐예요?”
“음, 수확은 다 자란 당근이나 무를 거두어…뽑는다는 거야.”
미소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딘지 궂은 미소를 짓는다.
“자, 선생님 수확하는 거 먼저 봐봐.”
나는 무성한 당근잎의 아래 부분을 잡아 쏙 뽑아 본다. 세상에, 무성한 잎과 달리 이렇게 작은 당근이라니.
“애기 당근인가 봐요, 선생님.”
“음, 그러네.”
땅에서 갓 수확한 당근은 내 가운뎃손가락만 했다.
생각보다 작았지만, 축축한 흙냄새와 당근 냄새가 풍겨왔다.
“근데 당근 냄새 엄청나요!”
미소는 앞에 있는 당근잎을 쑥 잡아당긴다. 한솔이는 미소를 슬쩍 본 후 자기 앞의 당근잎을 뽑는다.
아이들이 뽑은 당근은 내가 뽑은 것보다는 크지만 이것들로 요리는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저 또 뽑을래요.”
“당근은 한 명당 두 개씩만 뽑을 거야. 한 번만 더 뽑고 이제 그만 뽑는 거야.”
미소는 당근을 뽑는다는 행위에 재미를 느끼는 듯했다. 폭신한 땅속에서 당근은 쑥 올라왔다.
미소는 당근을 뽑으며 환호성을 지른다. 눈 깜짝할 새에, 옆에 있는 당근을 뽑는다.
“미소야 ㅡ 당근은 두 개만 뽑기로 했지?”
내가 말함과 동시에 미소는 그 옆에 있는 당근도 뽑는다.
“미소야ㅡ!”
미소의 손에는 벌써 네 개의 당근이 들려있었다. 미소의 손을 저지해야 했다. 미소가 더 뽑아버리면 다른 어린이는 당근을 뽑을 기회가 없어진다. 심어진 당근은 한정적이다. 나는 미소에게 충분히 당근을 뽑았다는 말과 하며 미소를 운동장으로 데려갔다. 휴,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이지? 다시 돌아온 텃밭은 당근 없는 당근밭이 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미소에게 신경 쓰느라 미처 보지 못한 한솔이의 작품이었다.
한솔이는 정해진 약속을 잘 지키는, 나의 잔소리가 필요하지 않은 아이였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한솔아 이거…당근 네가 다 뽑은 거니?”
한솔이의 양손에 당근잎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한솔이는 뿌듯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벌어진 일로 한솔이를 나무라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미소와 한솔이는 ‘무 수확하기’에는 제외하기로 하고 나머지 아
이들과 무를 수확했다. 무를 수확하며 아이들은 한 마디씩 말한다.
“선생님, 저 당근 안 뽑았는데요?”
“당근 어디 있어요? 당근은 언제 뽑아요?”
“당근 누가 다 뽑았어요?”
“왜 쟤네(미소와 한솔이)만 당근 뽑았어요?”
어찌저찌 텃밭에 있는 당근과 무를 모두 수확했다. 작은 라탄바구니에 작물을 나누어 담아 아이들에게 들게 했다. 바구니를 들며 유치원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꼬마 농부 같았다. 당근 농부도 두 명있었다. 교실로 돌아와 우리가 수확한 당근과 무를 깨끗이 씻어 생으로 먹어보기로 한다. 편식하는 아이들이 몇 있지만 직접 키운 채소는 맛보려고 시도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나는 깨끗이 씻은 당근과 무를 작은 스틱 모양으로 썰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얘들아 한입씩 먹어볼까?”
“맛있어요! 당근이 달아요.”
당근이 달다니, 유기농 텃밭 재배의 힘인가? 아이들이 당근이 달다고 한 건 처음이다.
“당근이 진짜 주황색 맛이에요!”
“당근 맛있다, 무는 조금…써요.”
“무는 쓰니?”
“전 무도 맛있어요!”
무를 먹는 아이들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지는 걸 보니 무는 약간 알싸한 것 같다. 그래도 당근은 맛있게 먹는 모습이다. 나도 당근을 먹어본다. 한 입 베어먹자 진한 당근 향이 안에 퍼진다. 나는 놀란 토끼 눈으로 아이들
을 바라본다.
“너희들 말처럼, 당근 정말 맛있는데?”
“선생님…저 이거 안 먹어요.”
저 멀리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미소에게 다가가 본다. 무는 반 정도 먹었는데, 당근은 아예 입도 안 대었다.
“미소야! 미소가 당근 다 뽑았잖아 당근 농부님, 맛은 보셔야죠. 친구들이 말하길 당근 정말 달대.”
“난…못 먹겠어요.”
“그럼 한 입만 살짝 맛볼까?”
“…”
미소는 접시 위에 놓인 당근 스틱을 앞으로 밀어버린다. 아, 당근을 뽑았다고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아니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당근 특유의 향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다른 조리법으로 당근을 먹어보면 될 터였다. 나는 두 번째 당근 농부, 한솔이한테 갔다. 한솔이는 그래도 두 입은 먹은 것 같았다.
“한솔아, 당근 다 먹은 거니?”
“…”
“남기는 거니?”
한솔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한솔이도 다른 조리법으로 당근 먹어보면 된다. 그렇게 당근 농부들의 접시에만 당근 스틱이 남겨져 있었다. 수확한 작물을 먹든 안 먹든, 오늘 어린이는 우리가 가꾼 채소를 직접 뽑고, 다듬어 먹어보았다. 작은 경험이었지만 어린이가, 우리가 먹는 음식이 대뜸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땅과 자연의 정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