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의 어린이 中 겨울의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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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풍경 안 어린이의 모습은 넋 놓고 보게 된다. 어린이는 자연성이 아직 훼손되지 않은 존재다. 루소의 ‘에밀’이라는 책에서 말했듯이 ‘자연은 어린이가 어른이 되기 전에는 어린이로 있기를 바란다.’ 자연에 있을 때 어린이의 모습은 가장 어린이답다. 어린이는 자연을 좋아한다. 자연은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다채롭고, 생동감 있다. 어린이는 그곳에서 자유롭게 상상하고 놀이한다.
내가 어렸을 적 가장 좋아했던 놀이 중 하나는 흙 놀이였다. 흙으로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성, 언덕, 음식, 똥, 지렁이, 각종 곤충 벌레…물을 부어 점성을 조절하면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길도 만들 수 있다. 흙을 좋아했던 이유는 만지는 촉감, 모양, 성격이 변하면서 함께 놀이하는 친구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성에는 고정적인 것보다 유동성있는 것을 선호하는 면이 있다.
그날은 출근하면서 함박눈이 왔다. 약간의 습기를 머금은 눈이었다. 눈은 몽글몽글 천천히 내렸다. 유치원으로 가는 길이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아이들도 이런 길을 보고 올까? 차를 타고 오는 아이들은 제대로 느낄 수 없을지 모르겠다. 눈이 쌓이면 내일은 눈놀이를 할 수 있을 터였다. 교실에 들어온 아이들은 하나같이 들떠있었다.
“너도 눈 봤어?”
“난 아빠랑 눈 잡고 왔어!”
“난 창문으로만 눈 봤어.”
“여기서도 눈 보인다! 눈 봐봐, 눈! 눈!”
제각각 눈에 대한 감상을 나눈다. 눈이 오는 날은 아침 가방 정리가 수월하지 않다. 정리는 뒷전, 아이들은 교실 안 창문 앞으로 달려간다. 까마득한 하늘에서 하얀 솜이 내려오는 풍경은 과학적 원리를 알고 봐도 신기하다. 원리를 모르는 아이들은 얼마나 경이로울까. 하원하는 시간에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내일 ‘눈놀이’를 할 거니까 꼭 장갑을 챙겨오라고. 눈놀이 때 사용하고 싶은 놀잇감이 있으면 가져와도 된다고. 몇 몇 아이는 “저 장갑 없는데요?” 라고 말한다. 장갑은 한 짝 정도는 있지 않을까? 정말 장갑이 없는 아이는 어떡하지? 노파심에 부모들에게도 내일 장갑을 꼭 챙겨 달라는 메신저를 남긴다. 조용히 쌓이는 눈은 이불 눈이 되어 흰 놀이터 만들어 줄 것이다.
우리 집은 4층이다. 커튼을 열면 앞집 다세대 주택들의 지붕이 보인다. 눈이 이불 솜처럼 잘 덮여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눈놀이를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아이들과 눈놀이하기 위해 몇 개의 장갑을 챙기고 방한 신발을 신었다. 나도 눈놀이를 무척 좋아한다. 도시에서 어른은 눈 놀이를 하기에 조금 민망하다. 어른답지 않다는 시선을 스스로에게 씌운다. 그러나 아이들과 함께라면 눈치 볼 것 없이 어른도 즐길 수 있다.
아침부터 아이들의 목소리가 돌림 노래처럼 들려온다.
“선생님 저 장갑 가지고 왔어요!”
“저는 하츄핑 장갑이에요.”
“저는 또봇 장갑이에요!
이모가 사준 거예요. 이것 좀 보세요!”
“장갑 가지고 왔어요, 선생님!”
아이들의 장갑에 하나하나 반응을 하다보니 아침 시간이 훅 지나갔다. 장갑을 갖고 오지 않은 아이가 두 명 있었다.
“엄마가 깜빡하고 안 챙겨 줬어요.”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이럴 경우를 대비해 집에서 여벌 장갑을 가지고 왔다. 아이들의 손에는 턱 없이 크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하며 아이들을 단단히 채비시키고 밖에 나갔다. 집에서 눈 오리를 만드는 기구를 가져온 아이도 몇 있었다. 나도 만들어보고 싶었다. 가져오지 않은 친구들에게 눈오리 기구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바깥에 나오자마자 아이들의 함성이 터진다. 아무도 밟지 않은 이불 눈이 곱게 덮여있다. 아이들은 아무 흔적 없는 그곳에 서둘러 발자국을 찍는다. 저 끝까지 달려 나가는 어린이가 있다. 온몸으로 눈을 껴안기라도 하듯 두 손 가득 눈을 담는 어린이도 있다.
주안이는 주춤했다. 눈을 만지지 않고 다른 아이들이 놀이하는 모습을 잠시 쳐다보았다. 아이들과 함께 눈의 세상에 들어가려는 찰나, 주안이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쉴 새 없이 들어오는 아이들의 부름에 응답하기로 한다. 우리는 눈사람을 만들기로 한다. 처음 단단한 눈송이는 내가 만들어준다. 아이들은 내가 만든 눈송이를 받아 삐뚤빼뚤 눈을 굴려본다. 아이들과 한참 눈사람을 만들고 눈을 날리며 신나게 놀고 있는데 저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있는 주안이를 발견했다. 지금 시간이면 주안이도 눈과 물아일체가 되어있을 줄 알았다. 주안이는 아직 눈을 탐색 중이었다.
“주안아 이렇게 눈을 뭉쳐서 단단하게 만들 수 있어.”
나는 단단하게 만든 눈송이를 주안이의 신발 앞 코에 소심하게 던져본다.
“주안이도 만들어봐.”
“차가워서 싫어요.”
주안이는 손 끝으로 눈을 콕콕 찌른다. 주안이는 감각이 예민하고 익숙한 감각을 편안하게 느낀다.
“아아, 뭐야!”
갑작스레 누가 주안이에게 눈을 던졌다. 하진이었다. 하진이는 나오자마자 온 세상 눈을 다 만지며 뛰어다닌 친구였다.
“왜 던져!” 주안이의 인상이 구겨졌다.
“선생님, 눈 던지면 안 돼요?” 하진이가 물어본다.
“던져도 되는데, 친구가 없는 곳으로 던져볼까?”
주안이는 몸을 꿈틀거린다. 뒷덜미로 들어간 눈이 꽤 차가운 모양이다.
“너무 차가워요.” 주안이의 표정이 간질거린다. 주안이는 손으로 눈을 살짝 퍼 자신의 볼에 갖다 댄다.
“아, 차갑다. 선생님도 해봐요.” 하진이의 돌발 행동 덕에 조금 전까지 싫어했던 느낌이 흥미로운 느낌이 된 것 같았다. 나는 하진이가 어디로 갔는지 눈으로 았다. 하진이와 미솔, 유라, 진이는 눈 위에 누워 뒹굴뒹굴하 있었다. 나는 약간의 잔소리를 하러 뒹굴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누워있는 아이들의 표정은 세상을 다 얻은 듯 했다. 하얗고 포근한 배경과 해맑은 웃음들, 현재를 누리는 아이들…옷이 젖어서 감기에 걸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비우고 나도 같이 누워버렸다. 티 없이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포근한 눈 위에 누워있으니 새삼 잠이 올 것 같은 편안함이었다.
우리는 함께 눈으로 눈을 보았다. 색을 잃어버린 하얀 풍경과 순수한 모습. 눈으로 할 수 있는 놀이도 다 해보았다. 눈 탐색, 눈싸움, 눈사람, 눈 오리 만들기, 눈 위에 눕기, 눈 소꿉놀이…눈은 뭐든 될 수 있다.
아이들의 눈 놀이가 거의 끝나갈 무렵 가루눈이 왔다. 나는 눈 오는 풍경 속 어린이를 바라보았다. 어린이의 시절이 지나 어른이 되면, 일상의 분주함으로 눈 오는 풍경을 지긋이 보기 어렵다. 눈 소식은 설렘보다 출퇴근 시 혼잡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준다. 어떤 신발을 신어야 미끄러지지 않고 빨리 길을 걸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다 씁쓸해진다. 어린이의 마음에 눈은 오직 찬미의 대상이다. 매년 보는 눈이지만, 매년 보는 꽃처럼 눈 오는 풍경은 새로운 것이다. 어른의 염려가 존재하지 않는 이 순간 풍경을 오래 간직하기로 한다. 어린이와 실컷 놀았다. 나의 마음은 눈처럼 깨끗이 씻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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