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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그시 Jul 24. 2024

한 지붕 아래 두 가족

아빠가 없는 저희 집의 풍경은 다른 집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가 아침 준비를 하는 사이 저는 청소를 합니다. 아침을 먹고 엄마가 출근한 뒤에는 설거지와 다른 집안일은 한 후 글을 쓰며 작업을 하고, 엄마가 돌아온 뒤에는 각자 시간을 보내다 잠이 들죠. 그러다 새벽에 아빠가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면 그 풍경은 사뭇 달라집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거나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자연스럽게 아빠 방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아빠가 자고 있다면 그때부터 집은 무음모드가 되어야 하니까요. 아빠가 절대 잠에서 깨지 않도록 하기 위한 엄마와 저 둘만의 약속입니다. 

아빠는 술을 먹고 들어와서 집에서 자다가도 갑자기 일어나서는 다시 나가 술을 마십니다. 아무리 술에 잔뜩 취해도 다시 술을 마시러 나가는 아빠의 습관은 점점 심해졌고, 정말 큰일 나겠다 싶을 때 엄마가 다시 나가려는 아빠를 막으려고 했지만 성인 남자의 힘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아빠가 술을 먹고 들어와 자는 동안 절대 깨지 않도록 큰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는 걸 집 안의 암묵적인 룰로 삼아 철저하게 지키게 됐습니다.

그래서 아빠가 자는 동안 집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엄마는 TV를 무음으로 보고 핸드폰도 모두 진동으로 해놓죠. 현관문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도록 살살 열고 닫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제 방 바로 옆이 아빠 방이기 때문에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습니다. 아빠가 자는 동안은 늘 이어폰을 낀 채 생활해야 했고, 안에서 움직일 때도 슬리퍼를 신으면 발자국 소리가 커지기 때문에 벗은 채 조심스럽게 왔다 갔다 합니다. 과자 봉지 소리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도 내면 안 됩니다. 사실 다른 건 다 조심해도 방에서 과자를 먹느라 부스럭 소리를 낼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와 잠시 동안 노려본 후 나갑니다. 

한동안 아빠가 들어오면 한숨부터 나왔습니다. 이런 답답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노이로제가 돼서 많이 힘들었죠. 집 특성상 방음이 전혀 안 됐기 때문에 저는 특히나 더 조심해야 할 부분이 많아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은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엄마도 제 방에서 조금이라도 큰 소리가 나면 예민하게 행동할 때가 있어서 더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아빠가 잠에서 깨 다시 술을 먹으러 나가면 해방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아빠를 가족의 적처럼 취급했을 때는 술을 먹고 자고 있는 아빠를 보면 답답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며칠이나 들어오지 않아도 걱정 하나 안 됐습니다. 하지만 아빠가 내 아빠라는 걸 인정하고 살자고 결심한 때부터 집에서 자고 있는 아빠를 발견할 때면 아주 조금이지만 안심이 됐습니다. 적어도 아빠가 길에서 쓰러지지는 않았구나, 술을 먹고 길을 건너다 차에 치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니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면 안 될 생각을 품었던 저는 아빠를 걱정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제까지의 제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죠. 

조금씩 쌓인다는 건 바로 눈앞에 나타나지 않고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분명 쌓여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같습니다. 쌓이고 쌓이다 보면 오래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그 노력이 시야에 분명히 보일 정도로 나타날 테니까요. 그 사실을 믿으면서 힘을 내다 마주한 마음의 변화는 아주 작을지 몰라도, 저에게는 이제까지 중 가장 크고 의미 있는 변화였습니다. 마치 그다음을 위해 더 노력해도 된다는 사인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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