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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그시 Jul 17. 2024

나의 아빠, 언니의 아빠

같은 가족 안에서 자라도 첫째냐, 둘째냐에 따라 그 아이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쉽게 체감할 수 있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유독 그 사실이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같은 한 명의 아빠를 뒀지만 언니에게 있어서 아빠란 존재는 제가 아는 아빠와는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죠.

저는 언니가 9살 때 늦둥이로 태어났습니다. 그 말은 언니는 저보다 9년을 먼저 우리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사실이 언니에게 있어서 축복할만한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도 때때로 생각합니다.

아빠의 알코올중독 문제는 엄마와 결혼을 할 때부터 있었습니다. 언니도, 저도 태어날 때부터 늘 그 문제와 함께였죠. 하지만 언니와 저는 노출된 환경이 많이 달랐습니다. 지금 아빠는 술을 먹고 며칠 동안 연락이 안 되다가 집에 돌아와서 바로 잠만 자는 식으로 생활합니다. 알코올중독이라고 하면 쉽게 상상되는 그런 안 좋은 모습은 거의 없는 상태죠. 하지만 언니가 어릴 때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는 술을 먹고 난 뒤의 행동이 주변에 피해를 주는 방식이었고, 언니는 그런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이미 잊어버린 엄마가 우울증에 걸려 힘들어하던 그 시기를 언니는 정확하게 기억한 채 성장했습니다. 그게 언니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분명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아빠라는 존재는 중요하지만 특별히 딸에게는 아빠라는 존재가 다른 의미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미래의 가능성을 완전히 접어두게 만들거나 혹은 너무나 제한 없이 열어 놓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죠. 언니는 대학교를 들어간 이후 아무 남자나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언니가 지금까지 사귀었던 남자들을 부족하다고 말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언니는 누가 봐도 언니에 비해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부족한 남자만을 골라 만났습니다. 가령, 어느 날 남자친구라고 엄마에게 소개한 남자가 키는 언니 어깨 정도고, 나이는 훨씬 많으며, 중국집에서 허드렛일과 배달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식이었습니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전문직으로 일을 하는 언니가 어떻게 만났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남자들만 사귀던 언니는 그런 사람 중 한 명과 결혼을 했습니다.

언니는 마치 아빠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빠를 보고 느낀 감정을 그대로 자신에게 투사해 스스로의 자존감을 끝없이 낮추려는 듯 보였죠. 언니가 데려오는 남자들을 보면서 언니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가치가 없다고 되뇌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언니가 아빠를 비난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늘 동정하는 태도로 아빠를 대했죠. 언니가 아빠에게 화가 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언니는 아빠에게 분노를 쏟는 대신 그 감정을 동정으로 바꿔 아빠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동정으로 포장되지 못한 감정들은 점점 바깥으로 새어 나와 언니 스스로에게 향했고, 언니는 아빠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동정하며 자기가 가치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건 어쩌면 첫째라는 부담감과 책임감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그러지 않지만 고등학교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저는 아빠에게 제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채 화도 내며 다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분출되지 못한 언니의 감정은 계속해서 쌓여만 갔고, 결국 곪게 된 겁니다.

지금도 언니의 우울증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바쁘게 아이들을 키우느라 스스로의 감정에 집중할 틈이 없어 잦아든 것 같지만, 때때로 언니는 이유 없이 무기력해 보입니다. 엄마가 언니 때문에 힘들어 하는 걸 볼 때마다 언니가 원망스러워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언니는 지금도 견디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아이를 키우며 엄마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중인 언니는 아이들이 우는 걸 보고 있지 못합니다. 어릴 때 홀로 울던 시간이 기억나는 걸까요? 제가 모르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던 언니의 시간은 여전히 그 시간에 멈춰 있습니다. 요즘 엄마와 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찾아오는 언니와 아이들에게 좋은 시간을 선물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노력 중입니다. 아이들을 혼내지 못하는 언니를 대신해서는 제가 아이들에게 따끔한 훈계 역할을 담당하고 있죠. 저와 엄마가, 그리고 아빠까지도 언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언니가 오롯이 그 존재만으로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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