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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그시 Jul 03. 2024

부재중인 기억에 감사를

때때로 유치원 정도의 어린 시절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어떻게 그 시절의 일까지 기억하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대부분이라고 할 정도로 주변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데, 다만 저는 늘 그 대부분에서 예외였습니다. 저에게는 초등학교 때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죠. 사실 중학교 때의 기억조차 백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흐릿합니다. 이런 저의 기억 상태에 대해 엄마에게 처음 말했을 때, 엄마가 짓던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제가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무렵 엄마는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고 합니다. 원인은 아빠의 잦은 음주 때문이었죠. 결혼하던 당시에도 아빠는 알코올중독 수준으로 술을 마셨고, 엄마는 홀로 집에 방치되면서 서서히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전혀 없는 저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엄마는 저에게 그때의 기억이 없는 이유가 아마 엄마 때문일 거라고 말했습니다. 우울증에 걸린 나머지 저와 언니를 잘 돌보지 못했고, 어떤 날에는 정도가 심할 정도로 매질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언니가 중, 고등학교 때 방황하고 대학교 초반에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리는 등 그 삶이 순탄치 못했던 이유도 엄마가 우울증에 걸려 어린 시절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눈물 흘리며 미안하다고 하는 엄마를 보며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저는 엄마의 탓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는 남편의 옆에서 병들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저는 그저 그 시간을 잘 버텨서 지금의 제 곁에 있는 엄마가 고마웠습니다. 엄마는 사실 지금 다시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심한 우울증을 겪은 일을 경험으로 우울증 초기에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가 더 심해지지 않도록 약을 먹으며 꾸준히 병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에게 그때의 기억이 없다는 사실이 감사합니다. 만약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면 제가 지금처럼 엄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었을지 확신이 서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저에게는 그 시절의 기억이 부재중이고, 그렇기에 제 감정과 엄마의 상황을 분리해서 엄마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뇌는 무의식적으로 안 좋은 기억을 없앤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저의 경우 그 당시 너무 어렸고,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이어서 저 스스로가 그 기억을 없앴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기억이 미래의 저에게 필요 없을 거라는 걸 미리 알았던 걸까요?

과거의 기억이 점점 사라지고 흐릿해지는 건 미래에 새롭게 맞이할 순간들을 잘 기억하기 위해서고, 안 좋은 기억이 사라지는 건 더 밝은 미래를 선택하기 위해서인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안 좋았던 기억이 점점 뚜렷해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건 그 순간을 그저 외면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이런 생각도 문득 듭니다. 우리의 뇌가 자동적으로 이런 신비한 일을 한다니. 마치 누군가가 그런 기능을 미리 계획해 탑재해 놓은 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과거 아빠에 대한 기억 또한 거의 없습니다. 때때로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주던 모습과 거실에서 TV를 보던 모습이 다입니다. 그래서인지 언니와는 다르게 아빠에게 쌓인 오래된 앙금은 없는 것 같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쌓인 감정들이죠. 그래서 음식 취향만큼은 아주 잘 맞는 아빠와 가끔이긴 해도 웃으며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지만 오늘도 부재중인 저의 모든 기억에게 그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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