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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그시 Aug 07.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알코올중독인 사람의 딸로 지금까지 살아오며 늘 불행하기만 했냐고 묻는다면, 저는 잠시 고민은 하겠지만 끝내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을 겁니다. 이제까지 줄곧 아빠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쭉 이어왔습니다. 그것 또한 분명 사실입니다. 이제까지 살면서 저를 가장 무겁게 짓눌렀던 건 틀림없이 아빠의 존재였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아빠가 제 아빠였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은 분명 존재했습니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른이 돼서 가질 직업과 배우자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외일지 모르지만 저는 이 두 가지 문제에 있어서 무척 자유로운 선택지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의 친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모두 교직에 종사하다가 은퇴한 분들입니다. 특별히 친가 쪽 친척 어른들 중 공무원을 하셨던 분들이 많아서 그런지 할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은 모두 저를 보면 교사나 공무원을 하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외할아버지 쪽은 가벼운 조언에 그폈지만 친할아버지 쪽은 무조건 공무원을 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이었죠. 지금도 늘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고 계시지만 저는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아빠는 무조건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를 보고 온 날에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버릇처럼 말합니다. 그 이유는 아빠 자신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술 문제도 그렇지만 아빠는 안정적인 직업을 바라는 할아버지의 의견과 반대로 미대를 졸업해 유학을 갔다 오는 등 예술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속박되지 않고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작업을 하고 싶은 만큼 하죠. 술을 먹고 일주일에 작업을 한 번도 하지 않을 때가 수두룩하지만, 어쨌거나 자유로운 태도는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고 엄마는 말합니다.

또 아빠는 스스로 술을 먹으면서도 주변에 민폐를 끼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술을 끊는다고 말하죠. 특히 술에서 깬 날에는 더 미안해합니다. 문제는 며칠을 집에 안 들어오다가 술에서 깨서 미안해하며 며칠을 보낸 뒤, 다시 술을 먹고 며칠을 집에 안 들어오다가 다시 술에 깨서 미안해하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겁니다. 아빠는 365일 가족에게 미안해하며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엄마와 제 의견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언니와 저를 대안학교에 보내겠다고 했을 때도, 제가 문예창작학과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지금도 집에서 글을 쓰는 저에게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습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부모님의 기대와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 달라 갈등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체로 좋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부모님이 그와 같은 기준, 혹은 그보다 더 높은 기준을 자식에게 요구함으로써 벌어지는 갈등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람은 모두 가지고 있는 삶의 가치와 그 기준이 다릅니다. 그리고 자신의 최저 기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렇지 않은 상대방에게 큰 부담을 주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빠의 경우에는 스스로의 최저 기준이 이미 최저한도로 낮기 때문에 가족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주변에 이런 문제로 부모님과 갈등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그래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복을 받았구나.’라고 종종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빠 때문에 우리 가족은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고 여겼을 때는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빠가 아빠라서 다행이라고 안심한 적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는 아빠의 술 취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도 어김없이 일주일에 몇 번이고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모습을 보고 기대하는 걸 그만뒀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늘 미안해하는 아빠가 제 꿈을 응원한다고 할 때는 아빠가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고, 그저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고 되새깁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아빠를 보면 아빠의 존재 자체가 미워지지 않고, 그저 술을 먹는 아빠의 약한 마음을 잠시만 원망하게 됐으니까요. 

실제로 알코올중독인 사람들을 보면 마음에 중심이 없이 흔들리고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어째서 아빠가 이렇게 됐을까. 왜 기쁠 때도, 슬플 때고, 화가 날 때로, 억울할 때도 가족과 나누지 않고 홀로 감당하며 술만 마시게 됐을까, 진심으로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정말 최악이라고 생각한 상황에서도 조금 시선을 바꿔보면 그렇지 않은 부분이 분명 있다는 사실을 아빠를 마주하게 되면서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진부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늘 불행하기만 하고 늘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위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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