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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그시 Aug 21. 2024

음식으로는 통하는 사이

아빠와 저의 사이는 사실 심각하게 나쁘지는 않습니다. 제가 예민하게 굴 때가 종종 있지만 전반적으로 술을 먹고 들어온 아빠에게 밥을 차려주고, 맛있는 게 생기면 때때로 나눠 먹을 정도로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속으로 안 좋은 생각도 많이 하고 오래 미워하면서도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아빠와 제 음식 취향이 잘 맞았기 때문입니다.

엄마 말에 의하면 언니는 엄마의 입맛을, 저는 아빠의 입맛을 닮았다고 합니다. 엄마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고 먹어도 오로지 살코기나 닭가슴살을 먹습니다. 그리고 고기보다는 야채를 더 즐겨 먹죠. 언니도 엄마를 닮아 고기를 즐겨 먹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아빠는 모든 고기를 다 잘 먹습니다. 저도 그런 아빠를 닮아 대부분의 고기를 다 잘 먹죠. 닭껍질이나 비계 부분도 가리지 않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집에서 다같이 닭을 삶아 먹은 적이 있는데 잠시 부모님이 한눈을 판 사이 제가 닭껍질을 다 뜯어 먹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여전히 아빠는 자주 집에 생오리나 생닭을 사와 고와 먹었는데, 그럼 자연스럽게 닭다리와 날개 반쪽은 제 것이 되었습니다. 밖에 나가서 닭백숙이나 오리백숙을 먹고 와도 꼭 닭다리와 죽을 제 몫으로 챙겨 왔습니다.

그리고 아빠는 과일을 무척 좋아합니다. 사과, 배, 복숭아, 자두, 포도 등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제철 과일을 늘 입에 달고 살죠. 주로 먹고 싶은 과일이 생기면 직접 사오는 편인데 여름만 되면 포도를 잊지 않고 사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포도라는 걸 알고부터 겸사겸사 늘 사오게 된 거죠. 또 저도 과일을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에 아빠가 과일을 사오면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그 외에 닭발, 족발, 순대 등을 아빠가 사오면 저와 아빠만 나와서 신나게 먹고 엄마는 고기 냄새가 싫다며 코를 막고 방에 들어가는 일은 일상입니다. 이런 수준이라 엄마는 종종 아빠 취향이 헷갈릴 때는 저를 불러 음식 상담을 합니다. 집에 있는 반찬으로 요리를 할 때 입맛이 조금 까다로운 아빠가 잘 먹을 수 있는 요리를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는데, 가령 청국장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끓여야 된다고 엄마가 말하면, 저는 두부만 넣으면 아빠가 안 좋아하니까 김치와 고기 비계를 같이 넣어서 끓이자, 라고 말하는 식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빠도 잘 먹고, 저도 겸사겸사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까요. 엄마는 연신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느냐는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에 재료를 다 넣은 뒤 간을 맞추는 일은 항상 제 몫이었습니다.

제가 먹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알고 음식 취향이 비슷한 것도 알아서 아빠는 술을 먹고 깬 날에 편의점 간식이나 치킨, 삼겹살 등을 사가지고 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손쉬운 방법으로 기분을 풀어주려고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저도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빠가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 하필 술을 먹고 집에 안 들어와 일정이 어긋났을 때는 그런 모습을 보면 그냥 한심하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스스로 알코올 중독임이 인정되지 않아 술을 조절할 수 없는 알코올 중독자인 아빠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 방안이 될 리도 없는 급한 불을 끄는 정도의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아빠가 우리 가족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작은 신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아빠가 멋쩍게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오면 봉지를 받아들고 밥은 먹었냐고 자연스럽게 물어보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라도 관계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한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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