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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그시 Sep 04. 2024

비난만 할 수 없는 이유

오늘은 9번째 이야기에서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어가 보려고 합니다.

아빠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아빠와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제대로 알아야 했습니다. 함께 살며 아빠가 가족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봤습니다. 예를 들어, 1년 중 한두 번 가족들의 생일을 맞아 외식을 하려고 약속을 하면 거의 90%의 확률로 약속 당일 술을 먹고 집에 안 온다거나, 집에 들어와도 가족과 맛있게 음식을 먹고 나서 그 직후 2박 3일간 술을 먹는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그래서 점점 1년에 온 가족이 외식하는 일이 하루도 없게 됐습니다. 

그리고 명절이 되어 할아버지의 집에 온 가족이 모이는 날에는 그 모습이 더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작은 아빠나 다른 고모들이 한 자리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아빠는 혼자 소파에 앉아 있거나 말없이 술만 마셨죠. 저는 한 번도 아빠가 다른 형제 자매와 제대로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거기에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빠와 할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아빠는 할아버지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 명절을 지낸 후 엄마로부터 아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결혼한 후 시어머니에게 극심한 차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집에서 쫓겨나갈 정도의 상황이 됐을 때 첫 임신으로 낳은 아들이 바로 아빠였고, 그렇게 겨우 극심한 차별에서 벗어나게 됐습니다. 이때 할머니에게 아빠의 존재는 아들을 넘어 우상적인 의미마저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시어머니에게도 아빠는 첫 손주였으니 더 의미가 각별했던 모양이라 다른 형제 자매들과 달리 돌아가시기 전까지 시어머니가 아빠를 따로 데려와 키웠다고 합니다. 아빠가 다른 형제 자매들과 서먹한 이유가 여기 있었죠. 이후에도 할머니는 아빠를 다른 자식 중 가장 특별한 대접을 하며 금이야 옥이야 키웠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엄한 호랑이 스타일의 아버지로, 조금이라도 늦게 일어나면 집안을 호령하며 매를 드는 등 당신의 뜻이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할아버지의 무조건적인 훈육 아래 아빠는 어른으로 성장했고 엄마와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때 이미 아빠는 알코올 중독의 수준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너무 소중하다는 감정은 특별한 대우를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다 보면 지켜야 할 선을 당연하다는 듯 넘게 됩니다. 할머니의 일방적으로 치우친 사랑은 아빠를 다른 가족과 분단시켰습니다. 거기에 더해 호랑이같이 엄하기만 하고 소통이 없던 할아버지는 아빠에게 있어 그저 두려움의 대상이 됐고, 그 관계에 애정이라는 감정은 쌓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아빠는 상냥한 사랑과 엄하기만 한 훈육 아래서 가족의 손으로 가족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의지할 대상으로 술을 골랐던 거죠. 가족 중 누구보다 사랑받았지만 올바른 사랑을 체감한 적 없는 아빠는 현재 자신의 가족을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늘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기뻐도, 슬퍼도, 화가 나도, 우울해도 그 속마음을 가족에게 말하는 일 없이 술을 마시러 갑니다. 

엄마는 할머니의 아빠에 대한 이상할 정도로 맹목적인 사랑을 오랜 시간 지켜보면서 지쳐갔습니다. 아끼는 아들을 며느리가 조금이라도 고생시키는 것 같으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으니까요. 언니를 낳은 후 아빠가 아기 기저귀 가방을 들고 있는 걸 보고 할머니가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더 이상 다른 설명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아빠에 대해 품었던 부정적인 감정이 반절로 줄어든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빠가 나쁜 사람이라 술을 마시고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빠가 그저 제대로 된 가족의 모습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아빠도 알코올 중독이 되어 가족을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가족이라는 공간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아빠의 모습이 때때로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아빠가 지금의 가족 안에서 불편하지 않도록 하고자 이 일지를 적기 시작하게 된 것도 같습니다. 알코올 중독은 이미 습관적으로 단단하게 굳어져 버려 고치기 어렵지만, 가족이 든든한 울타리이자 기꺼이 돌아오고 싶은 장소가 된다면 훗날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결심이 들 때 힘을 보태줄 수 있을 테니까요. 

요즘 공간이 참 중요한 삶의 요소가 됐습니다. 서점의 소설 제목만 훑어봐도 특별하거나 아늑한 공간을 모티프로 한 제목이 자주 눈에 띕니다. 저도 저만의 아늑한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역시 공간보다 그 안에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허름한 공간이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면 그곳은 호텔보다 더 따뜻하고 좋은 기억은 품은 곳이 되기도 하니까요. 지금 좋은 곳에 살지 않지만 부모님과 함께 있기에 이곳이 저에게는 더없이 소중합니다. 아빠에게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을, 가족을 선물로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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