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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그시 Sep 11. 2024

유리 바닥을 딛고 사는 사람들

저는 재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쓰라린 기억입니다. 첫 수능을 망친 원인은 컨디션 조절 실패에 있었습니다. 재수를 하게 된 흔한 원인이지만 저에게는 그 순간이 판에 새긴 듯 선명합니다. 컨디션을 망치게 된 그 날의 기억 속에는 아빠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건 아빠가 술을 먹고 문제를 일으켜서도 아니고, 딸이 수능을 보는 줄도 모르고 술을 먹느라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도 아니었습니다.

대안학교에 있다가 수능을 보러 간 저는 수능을 보기 전날 시험장 근처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인솔 선생님과 함께 숙박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깜짝 응원 차 엄마와 아빠가 갑작스럽게 게스트하우스에 찾아왔죠. 엄마와 함께 온 아빠를 보고 저는 사고가 정지하는 것 같았습니다. 수능을 보는 날 술을 안 먹은 아빠가 멀쩡한 정신으로 절 응원하러 올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당시 아빠는 이런 상황이 일어날 리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고 있었습니다. 항상 크고 작은 약속마다 술을 마시고 약속을 깼던 아빠밖에 모르던 저는 절 찾아와 제대로 된 응원의 말 하나 전하지 못한 채 엄마 옆에 서 있는 아빠의 모습에 충격 비슷한 걸 받았고, 그 모습이 가슴 한가운데 무거운 돌처럼 들어섰습니다. 그때부터 안 좋은 예감이 들긴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감대로 저는 국어 영역에서 거의 반절 정도의 문제를 풀지 못했고, 그 기세로 모든 과목의 시험을 줄줄이 망쳤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에게는 아빠에 대한 기대가 조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족에게 관심 가지고, 따뜻한 말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거겠죠. 대학에도 아직 입학하지 않았던 어린 제 눈에 아빠란 존재는 시간만 나면 술을 마시고 취할 줄밖에 모르며 엄마와 소리 지르며 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청소년 시기의 저는 늘 불안했고, 한없이 작아졌습니다.

아빠라는 존재가 있지만 없는 건 생각보다도 더 불안정한 일이었습니다. 엄마와 저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언제 술을 먹고 있을지 모르는 아빠를 의지할 수 있을 리 없었습니다. 중요한 약속에 당연하다는 듯 술을 마시고 나타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 적도 많습니다. 가령, 입학식과 졸업식, 명절은 당연했고, 아빠 본인의 중요한 사업 차원의 약속에도 술을 먹고 나가지 않아 문제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아빠가 있지만 없는 것처럼 지내야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유리 바닥을 딛고 매 순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본질적인 상황은 그대로입니다. 바뀐 건 그때보다는 제가 더 성장했다는 거고, 더 많은 것을 알고 볼 수 있게 됐다는 것 정도죠.

반면에 요즘에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제가 문예창작학과를 갈 수 있었던 건 재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첫 수능 때는 수능 성적에만 신경 쓰느라 어떤 과를 가야 할지 제대로 고민하지 못했습니다. 문예창작학과를 가고 싶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가진 건 재수를 하면서 충분히 고민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첫 수능 당시 아빠가 찾아왔던 건 저에게 있어 얇고 얇은 유리 바닥이 흔들리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빠를 아빠로 보고 있지 않다는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였죠. 그 사건이 제가 아빠와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 가장 처음의 계기였습니다. 

여전히 우리 가족은 불안정한 발판 위에 발을 딛고 서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어떻게 그 위를 걸어야 할지 조금은 알게 됐습니다. 여전히 한 걸음을 내딛어보려다가 삐끗해서 참을 수 없이 불안해지는 일도 생기지만, 분명 아빠는 저희 가족의 곁에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가장 불안한 모습으로 그 위에 서 있는 아빠를, 이제는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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