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2020년 64쇄 개정판을 발행했다. 『사피엔스의 미래』라는 책에서 알게 되어 읽었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작가다. 이 책을 25세에 썼다고 한다. 모든 신경이 사랑과 연애에 집중되어있는 시기다. 번역이지만, 작가의 재치 있는 문장이 무거운 분위기를 재미있게 이끈다.
‘나’는 운명적으로 파리에서 런던으로 오는 비행기에 같은 좌석에 앉게 된 매혹적인 여성 클로이를 만난다. 그리고 일 년 동안 연애한다. 일주년 기념으로 파리 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클로이는 ‘나’의 직장 동료 ‘윌’과 사귄다고 고백한다. ‘윌’은 미국에서 왔고 클로이와 윌은 미국으로 떠난다. ‘나’는 실연으로 혹독한 상실에 빠져 자살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다시는 연애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살아가는데, 디너파티에서 레이첼을 만난다. 저녁 식사를 약속하고 금욕주의자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은 소용없는 일이 된다.
사람이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은 지옥 같은 괴로움에 시달린다. 세상이 온통 잿빛으로 변하고 삶의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또 다른 인연은 오게 마련이다.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운명이라는 것을 만든다. 이때 저지르는 실수는 사랑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하는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다.
아름다움이 사랑을 낳을까, 아니면 사랑이 아름다움을 낳을까?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사랑할까, 아니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아름다운 것일까?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똑같은 요구를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 매우 온전해 보이고 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을 꿰뚫어 보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엘리아스 카네티(불가리아 태생 영국작가) 의 말이다. 타인의 흠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그러나 그것이 또 얼마나 무익한지를 암시하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꿰뚫어 보는 일을 중단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설혹 그 과정에서 눈이 약간 먼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좀 넓어지는 순간이면 우리는 낭만적 사랑이 기독교적 사랑과 비슷하다고 상상한다. 너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는 무비판적이고 너그러운 감정, 조건이 없고, 경계도 설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랑. 그러나 연인들에게 말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기독교적인 사랑은 침실로의 이행에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아시스 콤플렉스에서는 목마른 사람이 물, 야자나무, 그늘을 본다고 상상한다. 그런 믿음의 증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그런 믿음에 대한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간절한 요구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환각을 낳는다. 갈증은 물의 환각을 낳고, 사랑에 대한 요구는 왕자나 공주라는 환각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철학을 인용한다. 철학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와는 대조적으로 현상과 실재 사이의 차이에 냉혹한 관심을 가져왔다. 철학자는 중얼거린다. “나는 밖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망막 뒤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적 착각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철학자는 기대감으로 마음을 졸이면서 중얼거린다. “나는 아내를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시각적 착각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사랑에까지 확대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이 객관적 실재와 관련이 없는 내적인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나타난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온전하다는 느낌을 얻으려면, 근처에 나 자신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 때로는 나 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는 미래를 계획하면서 위로를 찾기도 했다. 우리는 어디에 살 것인지, 자식을 몇이나 낳을 것인지, 어떤 식으로 연금을 받으며 살 것인지 꿈을 꾸었다. 손자들을 산책시키거나 손을 잡고있는 주름진 노인들과 우리를 동일시 했다. 사랑의 소멸에 대항하여 우리를 방어하기 위해 웅장한 시간 속에서 함께 사는 삶의 계획을 정밀하게 짜면서 즐거워했다.
사랑의 거부가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을 이타성과 동일시하고 거부를 잔인성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정말로 사랑을 선과 동일시하고 무관심을 악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나를 거부하는 것은 비도덕적일까? 사랑의 종말은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도덕성과 비도덕성 사이의 충돌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두 충동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다. 이마누엘 칸트는 “도덕적 행동이 비도덕적 행동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고통이나 쾌락과는 관계없이 의무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나서 잊는다는 것은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한다. “이제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녀의 부재가 아니라, 내가 그녀의 부재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이었다. 망각은 내가 한때 그렇게 귀중하게 여겼던 것의 죽음, 상실, 그것에 대한 배신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젊은 시절로 되돌아갔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 헤어짐의 불편한. 그리고 끝없는 갈망, 이 모든 것이 청춘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책 중에 심리학이 많이 등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 그림, 뮐러-리어 착시(화살표 방향에 따른 선 길이 착시현상) 그림. 이 책을 64쇄까지 발행했다는 것은 읽어 볼 만한 책이라는 증명이 아닐까.
책 소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2002.07.15. 도서출판 청미래. 278쪽.
알랭 드 보통 Alain de Botton.
1969년 스위스 출생. 영국에서 활동하는 작가. 케임브리지 대학과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역사와 철학 공부,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 박사과정.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200만 부 판매, 사랑, 행복, 불안 등 현대인이 관심사를 주제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다수.
정영목.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같은 대학원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번역학과에서 강의하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