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이 책의 부제목은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일본 작가 오가와 요코의 소설 『은밀한 결정』을 소개한다. “사물과 기억이 사라진 이름 없는 섬은 여러모로 우리의 현재를 닮았다. 오늘날 세계는 비워지며 정보에게 자리를 내준다. 정보는 저 몸 없는 목소리들과 마찬가지로 유령 같다. 디지털화는 세계를 탈 사물화하고 탈 신체화한다. 또한 기억을 없앤다.”라며, “디지털 매체들이 기억 경찰을 대체 한다. 디지털 매체들은 전혀 폭력 없이, 더 큰 비용 없이 임무를 완수한다.”라고 한다.
땅의 질서는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지속적인 형태를 띠고 인간의 거주를 위한 안정적 환경을 형성하는 사물들 말이다. 그런 땅의 질서가 오늘날 디지털 질서에 의해 해체되고 있다. 디지털 질서는 세계를 정보화함으로써 탈 사물화한다. 저자는 정보를 반사물이라고 부른다. 지금 사물의 시대에서 반사물의 시대로 넘어가는 이행기에 있다. 사물들이 아니라 정보들이 우리의 생활세계를 규정한다. 우리는 땅과 하늘에 거주하지 않고 구글 어스와 클라우드에 거주한다.
세계는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되고, 구름 속처럼 자욱해지고, 유령처럼 되어간다. 어떤 것도 손에 잡히게 확실하거나 사물처럼 확고하지 않다. 디지털화는 세계를 탈 사물화하고 탈 신체화하고 결국엔 탈 실재화 한다. 디지털화는 기억을 없앤다. 기억을 되짚는 대신 데이터와 정보를 축적한다. 이런 정보 광증이 사물들을 사라지게 만든다. 정보가 사물에 속속들이 침투하면 사물을 정보 기계로 만든다. 정보를 처리하는 기계로 만든다. 스마트폰은 기계가 아니라 정보기계이고, 심지어 우리를 감시하고 조종하는 정보원이다.
사물은 우리를 엿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을 신뢰한다. 반면 정보기계로서의 스마트폰에 대해서는 신뢰가 전혀 없다. 스마트폰은 디지털 정보 지배 체제의 성물이다. 복종 장치로서 스마트폰은 묵주 같은 구실을 한다. 묵주는 다루기 쉽다는 점에서 휴대폰을 닮았다. ‘좋아요’는 디지털 ‘아멘’이다. 우리는 계속 고해한다.
스마트폰은 우리의 자아를 강화한다. 손가락을 놀리면서 우리는 세계를 우리의 욕구들에 종속시킨다. 세계는 총체적 처분 가능성이라는 디지털 가상을 띠고 우리에게 나타난다. 이를 통해 타자들이 사라진다. 바로 처분 불가능성이 타자의 타자성을 이룬다. 오늘날 타자는 타자성을 빼앗기고 단지 소비가능한 놈으로 된다. 스마트폰은 타자를 객체로 사물화함으로써 처분 가능하게 만든다. ‘너’를 ‘그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데, 그 이유는 바로 타자의 사라짐에 있다.
사물을 삶의 안식처라고 한 것은 사물이 인간의 삶을 안정화하기 때문이다. 같은 의자와 같은 탁자는 그것들 자신으로 머무르면서 무상한 인간의 삶에 안정성과 연속성을 부여한다. 사물들 곁에서 우리는 하염없이 머무를 수 있다. 반면에 정보 곁에서는 그러지 못한다. 정보는 현재성을 띠는 기간이 아주 짧다. 정보는 시간적 안정성이 없다. 정보는 다름 아니라 놀람의 흥분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정보는 지각을 파편화한다. 정보는 우리를 영원한 현재성의 현기증 속으로 몰아넣는다. 정보는 인지 시스템 자체를 동요시킨다. 우리는 의심을 품고 정보와 만난다.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의심을 품는다. 정보는 근본적인 불신과 동행한다. 정보는 우연 경험을 강화한다. 가짜뉴스는 정보 자체에 내제하는 강화된 우연의 화신이다. 또한 정보는 덧없기 때문에 경험, 회상, 깨달음 같은 시간 집약적 인지 실행을 사라지게 만든다.
사람들이 만나서 주로 자기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면, 만남이 무슨 소용이 있나? 연결망 형성과 전면적 소통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늘날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큰 외로움을 느낀다. 우리는 ‘너’를 처분 가능한, 소비 가능한 ‘그것’으로 만든다. 세계는 ‘너’가 심하게 결핍해진다. 그 결과로 우리는 외로워진다.
신뢰, 충실, 결속, 책임을 비롯한 모든 시간 집약적 실행들이 사라지고 있다. 모든 것이 단기화 되고 있다. 그 덕분에 우리가 더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단기성은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들에 매어둘 수는 있지만, 정보에 매어둘 수는 없다. 우리는 정보를 잠깐만 알아둔다. 그 잠깐이 지나면 정보의 존재 지위는 이미 다 들은 자동응답기 메시지와 같아진다. 가치가 0에 수렴한다. 예컨대 신뢰는 오늘날 투명성과 정보에 치여 해체되고 있는 사회적 관행이다. 신뢰는 앎이 부족하더라도 타자와 긍정적 관계를 맺을 능력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투명사회에서 사람들은 대뜸 타자에 관한 정보를 요구한다. 사회적 관행으로서의 신뢰는 불필요해진다. 투명한 정보사회는 불신의 사회를 낳는다.
“정말로 있는 것은 무엇이냐?”라는 존재론이 근본질문에 이 시대 다수의 학자는 “정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대답이 디지털화 선도자들의 단언이며, 대세에 순응적인 우리 다수는 4차 산업혁명을 운운하면서 이 대답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마치 기도문처럼 고개를 조아리며 왼다. 그러나 저자는 ‘정보’를 ‘반사물反事物’로 규정한다.
손은 노동과 행위의 기관이다. 반면에 손가락은 선택의 기관이다. 손이 없는 미래의 인간은 오직 손가락들만 사용한다. 행위하는 대신에 선택한다.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판을 누른다. 손 없는 미래 인간은 스마트폰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는 저 ‘포노 사피엔스’와 유사하다. 손가락 끝의 자유는 알고 보면 환상이다.
정보자본주의는 첨예화된 자본주의다. 정보자본주의는 비물질적인 것마저도 상품으로 만든다. 삶 자체가 상품의 형태를 띠게 된다. 모든 인간관계가 상업화된다. 소셜미디어는 소통을 깡그리 착취한다. 에어비앤비를 비롯한 플랫폼들은 손님에 대한 환대를 상업화한다. 인간적 호감은 별점이나 ‘좋아요’로 대체된다. 친구는 무엇보다도 먼저 개수를 세어야 할 대상이다. 문화 자체가 완전히 상품이 된다. 문화의 원천은 공동체다. 문화는 공동체를 창출하는 상징적 가치들을 매개한다. 문화가 더 많이 상품으로 될수록, 문화는 자신의 원천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귀결은 공동체의 파괴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우리의 지각을 그 장치에 위임한다. 우리는 그 화면을 통해 실재를 지각한다. 그 디지털 창은 실재를 정보로 희석하고 우리는 그 정보를 등록한다. 실재와 사물적 접촉은 일어나지 않는다. 스마트폰은 세계를 탈실재화한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이 우리를 사용한다. 스마트폰의 표면 너머에서 다양한 행위자들이 우리를 조종한다.
디지털 소통은 인간관계를 심각하게 저해한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연결망에 속해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 결합되어 있지 않다. 디지털 소통은 외연적이다. 그 소통은 집약성을 결여하고 있다. 연결망에 접속하기는 관계 맺기와 다르다. ‘너’는 오늘날 어디에서나 ‘그것’으로 대체된다. 디지털 소통은 인간적인 상대, 얼굴, 바라봄, ‘지금 여기에 있음’을 없앤다. 그렇게 디지털 소통은 타자의 사라짐을 가속한다.
심장의 리듬은 반복에 기반을 둔다. 모든 반복이 사라진 삶은 리듬이 없다. 박자가 없다. 리듬은 영혼도 안정화한다. 리듬은 그 자체로 불안정한 요소에 형태를 준다. 반복 불가능한 감정, 흥분, 체험의 시대에 삶은 형태와 리듬을 상실한다. 삶은 철저하게 덧없어진다.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철학적 대답이 이 책이라고 생각한다. 쉬우면서 어렵고 어려우면서 쉬운 책이다. 일독을 권하다.
책 소개
『사물의 소멸』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2022.08.23. 김영사. 191쪽.
한병철. 1959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했다.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철학, 독일문학, 가톨리신학을 공부했다. 베를린 예술대학교 철학, 문화학 교수를 지냈다. 저서. 『피로사회』, 『리추얼의 종말』 등.
전대호. 서울대학교에서 물리학 공부. 칸트의 공간론에 관한 논문으로 같은 대학에서 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저서 『철학은 뿔이다』.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