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 질병, 죽음에 마주하는 여섯 번의 철학 강의」
이 책의 부제목은 「나이 듦, 질병, 죽음에 마주하는 여섯 번의 철학 강의」이다. 책 카피는 “인생은 진화가 아니라 변화다! 젊음과 늙음, 건강과 질병에 우열은 없다!”이다.
이 책은 작가가 2019년 10월부터 2020년 3월까지 일본 NHK 교토 교실에서 한 철학 강좌, 한 달에 한 번 총 여섯 번 강의 내용을 엮은 것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행복해지는 법’, ‘우리는 모두 타인의 타인이다.’ ‘나이 듦과 질병을 통해 배우는 것’, ‘죽음은 끝이 아니다.’ ‘지금 여기를 살다.’라는 주제로 되어있다.
철학에 대하여 작가는 “기성의 가치관이나 상식에 의문을 품어야 한다. 지금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며, 정치가가 하는 말이 사실인지를 항상 의심해야 한다. 철학은 배우기 전과 후의 삶이 바뀌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학문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행위는 가치판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손에 들고 있는 분필을 놓아 버리면 분필은 반드시 바닥에 떨어진다. 분필에는 의지가 없으므로 맥없이 떨어진다. 하지만 인간의 행위는 그렇지 않다. 인간은 행위에 앞서 ‘목적’ 또는 ‘목표’를 세운다. 인간이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는 그 행위가 ‘선善’인지 ‘악惡’인지를 판단한다. 이 선과 악이 ‘가치’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행위가 자신을 위한 것이 될지, 자신을 위한 것이 되지 않을지를 판단해야 한다.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의 목적이나 목표, 일반적으로 ‘가치’를 생각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 의지에 따라 어떤 행위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으면 교육도, 육아도, 치료도 있을 수 없다. 사람은 바꿀 수 있다는 전제가 있기에 교육도, 치료도 가능한 것이다.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모든 일이 독재자가 바라는 대로 되고 만다. 이미 확고한 가치관이 있는 곳에 새로운 가치관을 주입하기는 쉽지 않지만, 없는 곳에 주입하기는 쉽다. 그래서 가치 상대주의는 독재의 온상이 된다.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위정자의 입맛에 맞는 가치관을 주입 당하기 쉽다.
여러 가지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보지 않아도 좋았을 현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현실을 모른 채로 사는 편이 행복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가 높이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바람이라는 공기 저항이 필요하듯이 고통도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다. 사는 것이 힘들어도 삶에는 가치가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행복으로 이어진다.
뇌과학에서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이 무의식중에 선택되며, 의식은 그 선택을 인정할 뿐이라고 보고 있다. 실제로는 자기 자신이 아닌 뇌가 어떠한 행동을 선택한 것인데, 나중에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아무도 불행을 바라지는 않는다.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그저 사는 것으로는 행복하게 살 수 없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자신에게 득이 되는지, 또 행복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행복은 궁극적인 것이고 성공은 행복을 위한 수단에 불과 하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인생은 거짓 인생이며 준비 기간일 뿐이고, 미래에는 가짜가 아닌 진짜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잘못이다. ‘행복은 존재’라는 말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지 않아도 ‘지금 여기’에 이미 ‘행복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행복에 ‘진보’라는 개념은 없다. 그렇기에 ‘더욱’ 행복해지는 일은 없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또 미래가 되어도 우리는 계속 행복한 것이다. 행복이 진보하거나 퇴보하는 일은 없다.
아름다움은 양적인 개념이 아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아름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나이를 먹어서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의 아름다움은 양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질적인 것이다. 행복은 독자적이며 더불어 질적인 개념이므로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족을 먼저 떠나보낸 경우, 고인의 꿈을 꾸는 동안은 고인과의 관계가 이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못다 한 일이 있어서인지 꿈을 꾸기만 하면 꿈속에 고인이 나타난다.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마냥 슬퍼만 할 수 없다. 억지로 슬픔을 억누르려고 할 필요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이전처럼 온종일 고인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날이 온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가 먼저 간 사람을 기억하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바로 여기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과 같다. 떨어져 지내는 가족을 떠올렸을 때, 문득 생각이 났을 때, 그 가족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경험과 같다. 그런 감각을 고인이 되어 세상에 없는 사람에게도 적용해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멀리 떨어져서 사는 가족이나 친구와는 언젠가 만날 수 있다. 죽은 사람과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
그 누구도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끊임없이 남의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을 주는 이들은 언제든 도움의 손길을 내밀 준비가 되어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 도움을 구하려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남에게 자신의 약점을 보이기 싫은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힘들 때는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관계를 쌓아 나가야 한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여겨질 때만 용기를 가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지금 내 모습 그대로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할 때, 대인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용기를 말한다. 대인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데 용기가 필요한 이유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마찰이 발생한다. 대인관계는 불행이나 고민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대인관계를 통해서 행복,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오래 사귄 연인과 결혼할 결심을 굳히는 이유는 이 사람과 함께라면 행복할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대인관계 안으로 발을 들여야만 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대인관계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용기를 낼 수 없다.
나이 듦을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은 인생 후반의 일이다. 부모는 내 자식이 이제 괜찮다,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싶으면 급격하게 늙어 간다. 반대로 아직 우리 아이에게는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건강해진다. 부모가 늙어 가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면 나이 듦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다. 글자가 잘 안 보이고, 치아가 약해져서 빠지기도 하고, 귀도 잘 안 들리게 된다. 쇠약해지는 것은 신체뿐만이 아니다. 기억력이 나빠졌다는 사람도 많다. 문제는 늙은 나이와 병 때문에 자신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신체가 약해지고 나이와 더불어 건망증이 심해지고 그로 인해 생활에 지장이 생기면 자신을 과소평가하게 되어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건강해지려고 하는 것인가? 무슨 목적으로 건강해지려고 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건강해지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건강해지려는 노력이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건강하지 않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건강은 행복하기 위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다. 그러므로 행복해지기 위해 꼭 건강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건강이 행복의 필수조건은 아니다.
미래는 없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의 희망을 추구하는 일은 아무 소용이 없다. 미래가 되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지리라 생각할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아무것도 못 하게 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이를 먹고 여러 가지를 할 수 없게 되더라도 그런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을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 일을 하면서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인생을 향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타인에게 용기를 주는 일이다.
행복은 자신이 타인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여기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남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설령 몸이 아프다고 해도 또 늙었다고 해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행복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관해 두 가지 가설을 든다. 하나는 죽음은 보통이 잠이 아니라 꿈을 꾸지 않는 잠이다. 죽음은 ‘꿈 한 번 꾸지 않을 만큼 깊이 잠들었던 밤’과 같은 것. 또 하나는 죽음은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영혼이 옮겨 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죽음은 이별이다. 그것이 어떤 식이든지 헤어지는 것인 이상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때가 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별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만 죽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타인의 죽음은 부재不在 이다. 죽은 사람은 세상에서 사라져도 세상 자체는 여전히 존속한다. 자신의 죽음은 꿈을 꾸지 않는 수면 상태일지도 모르고, 저쪽 세상으로 거처를 옮기는 거일 수도 있으며, 또는 무 無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자신이 살았던 세계는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다. 여기서 타인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에 큰 차이가 발생한다. 죽음이 무엇인지는 정말 아무도 모른다.
죽음이 어떠한 것일지라도, 가령 무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해도 지금 삶의 방식,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꿔서는 안 된다. 어차피 죽을 텐데 하고 자포자기해서도 향락에 빠져 살아서도, 남을 다치게 해서도, 제멋대로 살아서도 안 된다.
사람은 언젠가는 누구나 예외 없이 죽게 마련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결과가 정해져 있으니 죽음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죽음을 생각하는 일을 멈추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죽음을 기다리지 않으려면 오늘을 오늘만을 위해 사용하는 수 밖에 없다. 오늘에 충실하면 내일은 생각하지 않게 된다. 매일 충실하게 살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미래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사람은 현재를 사는 것이며 그 점의 연속이 인생이다. 그저 시시각각의 ‘지금’을 살아가다 보면 문득 삶을 되돌아봤을 때 오래 살았을 수도 있겠지만, 과거도 미래도 가질 수 없으므로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는 애초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젊어서 죽은 사람을 두고 ‘도중에 죽었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도중’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이다.
과거는 ‘이미 살아버려서’ 이제 어디에도 없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도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지는 못한다. 미래 역시 손에서 놓아야 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적으로 없다. 미래를 생각하면 괜히 불안해지기도 하는데, 그때가 되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 때문에 느끼는 지금의 불안은 의미가 없다.
살아가면서 정말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자신의 가치관을 의심하고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여야 한다.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주어진 ‘인생의 의미’라는 것은 없다. ‘인생의 의미’는 당신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생의 의미는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책 소개
『기시미 이치로의 삶과 죽음』 기시미 이치로 지음. 고정아 옮김. 2021.06.15. SA(에쎄이) Publishing Co. 221쪽. 15,000원.
기시미 이치로(岸見一郞). 1956년 교토 출생. 교토대학교 대학원 문학연구과 박사과정 만기 퇴학.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했다. 저서.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등
고정아. 국립 도쿄외국어대학에서 일본어학을 전공했다. 바른번역 소속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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