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aning of Life 시리즈
이 책은 Meaning of Life 시리즈 중 하나이다. 서두에 ‘이 시리즈의 기획 의도는 우리 사회에 삶의 의미라는 화두를 다시 던져보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심리학자 빅토르 프랑클은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이 의견에 동의하면서 삶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성찰하는 책들을 펴내고자 한다.’라고 편집 의도를 밝히고 있다.
저자는 아버지를 따라 스위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풍족한 생활을 하던 중 스물한 살에 결핵에 걸린다. 당시 결핵은 죽는 병이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인류가 남긴 위대한 책들을 모두 읽겠다는 결심을 하고 독일어, 이탈리아어, 희랍어 등 원어로 고전을 읽으면서 2년 동안 요양한 뒤에 다행히 결핵에서 회복된다. 고전문학을 전공하던 그녀는 1940년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해서 자신의 꿈인 의사의 길을 걸었다. 1957년부터 한센병 요양소 애생원에서 환자를 상담하면서 이 책을 완성하였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어떤 사람은 사는 보람을 느끼지 못해 괴로워하고, 어떤 사람은 사는 기쁨으로 넘쳐난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올까? 성격 문제다. 생활방식이나 마음가짐의 차이다. 대인관계나 사회생활 방식을 바꾸면 누구나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된다. 등등 여러 가지 답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는 보람이라는 문제는 쉽게 이거다 하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다.
사는 보람이라는 말은 두 가지 맥락에서 쓰인다. ‘아이가 내가 사는 보람이다’라고 말할 때처럼 사는 보람의 원천 또는 대상이 되는 존재를 가리킬 때와 사는 보람을 느끼는 정신 상태를 의미할 때가 있다. 정신 상태는 빅토르 프랑클이 말하는 ‘의미감’이다.
청년도 어른이 되면 존재의 의미를 묻는 마음가짐은 사라지고 삶의 흐름 속에서 덧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장년기는 정신없이 보내게 되고, 더 나이가 들어 지금까지의 사는 보람을 잃고 목표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될 때 다시 이 문제가 절실한 무게로 다가오게 된다.
사명감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충실한 방향으로 나가느냐가 문제이다. 그 목표만 옳다고 믿는 방향에 놓여 있으면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도중에 죽는다고 해도 만족할 것이다.
사회적 명예를 중시하는 남성과 아이가 중심인 여성이 부부일 경우. 공동의 가정을 꾸려가는 이상 두 사람에게 공통의 세계는 엄연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두 개의 원의 일부만 포개져 있는 것처럼, 공통된 부분 이외에는 완전히 다른 마음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런데도 그런 점을 깨닫지 못하고, 서로 의논하고 이해하면서 지낸다고 믿는다. 사람에게는 말이 부호와 같아서 같은 말도 사람마다 의미하는 내용이 다른데도 대충 서로 통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계기로 둘 사이의 불일치가 드러나면,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도 상대방이 자신에 대해 이렇게 모르고 있었나 하는 통렬한 고독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자기의 운이 얼마나 좋은지 깊이 감사해야 하는데도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런 것은 생각지 않고 그저 나쁜 운만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운명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연상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운명이 인간에게 꼭 나쁜 상황만 초래하는 것이 아니지만, 인간은 제멋대로 좋은 일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이별의 슬픔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못살게 구는 것은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일 것이다. 살아 있는 시간이 이렇게 제한되어 있지 않으면 아직 어떻게든 해볼 수도 있겠지만 죽음이 바로 눈앞에 다가온 지금은 그 벽 앞에서 홀로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신적인 고뇌는 타인에게 말함으로써 가벼워진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의 이해와 애정에서 위로받고 격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뇌를 개념화해 말로 표현하는 것이, 고뇌와 자기와의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 아닐까? 남에게 차마 말하지 못할 고뇌를 말로 표현하려고 할 때 사람은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자신으로부터 고뇌를 끌어내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려 한다. 이때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이 같이 봐주면 그만큼 고뇌를 객관화할 수 있다. 고통은 그 실체가 확실해질수록 고통에 압도되는 정도가 줄어든다. 그래서 가만히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시간은 마음이 아니라 내면의 자세를 바꿔 간다. 견디기 힘든 고통, 슬픔, 질병, 노화, 죽음도 시간이 극복하게 해준다. 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딱지가 생기고 조직이 재생된다. 이런 현상이 정신 영역에서도 이루어진다. 이에 관여하는 중요한 요소가 망각이라는 신비한 작용이다.
시간이 흐르면 외부 상황이 바뀐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대인관계, 새로운 사태를 맞게 된다. 인간은 좋든 싫든 그런 새로운 자극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낡은 감정과 욕구와 꿈은 차례로 의식 밖으로 물러난다.
오랜 진화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의식은 육체로부터 차츰 분리되었다. 그로 인해 한 인간 안에서 정신이 육체를 바라보면서 예속, 도취, 수용, 반항, 배척, 무시, 경멸 등 다양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분리는 이런저런 기회에 의식으로 올라올 수 있는데, 난치병에 걸렸을 때만큼 이 분리가 강렬하게 의식되는 경우가 없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은 자신이 벌거숭이로 의지할 데 없이 죽음 앞에 서 있다는 것이다. 현재 소유한 그 무엇을 저세상에 가지고 갈 수 있을까! 현실 세계에 대한 집착이 허무함을 알게 된다. 지위와 돈과 명예는 물론이고 타인에 대한 애착 역시 아무 소용 없다. 어린 자녀를 남겨두고 죽어야 하는 어머니 경우도 어린 자녀를 남의 손에 맡기고 가야 한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으로 끊어질 연緣을 미리 자신의 마음에서 끊는 것을 배운다.
삶에 목표가 있고 매일의 일상이 정해져 있을 때는 시간은 멈추지 않고 경과하기만 하면 그것이 어딘가로 자신을 데려갈 거라고 느낀다. 그런데 아무 목표도 없는 생활에서는 단순히 밤낮의 차이와 식사 기간이 있을 뿐, 미래에는 사막처럼 아무 구조물도 없는 시간이 펼쳐질 뿐이다. 여가도 일에 쫓기는 사람에게는 선물처럼 반갑고 즐거운 것이지만, 생활 전체가 여가가 되어버린 사람에게는 권태와 고통이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이런저런 것을 시도해 봐도 공허함과 무의미함을 느낄 뿐이다.
진정한 행복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위세를 떨치는 사람이나 흔히 말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불행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이 인간답다. 소박한 마음을 갖고 있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사라지지 않는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소중하지 않게 되고, 모두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이 중요해진다.
병든 사람, 제 몫을 못 하는 사람도 둘도 없이 소중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적어도 그렇지 않다면 우리 자신의 존재 의의도 누가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겠는가! 현재 건강한 정신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따지고 보면 그저 하나의 생명에 불과하다. 생명에 의해 성장하고 유지되어 욌기 때문에 정신적인 존재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이 도움 없이는 한순간도 정신적인 존재로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존재 의의는 이용 가치나 유용성에 달려있지 않다. 들판에 피는 꽃처럼 그냥 존재하는 사람도 위대한 자의 입장에서 보면 존재 이유가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갈까? 라는 의문이 생길 때 읽으면 좋은 책이다.
책 소개
『삶의 보람에 대하여』 가미야 미에코 지음. 홍성민 옮김. 2011.10.01. 필로소픽. 335쪽.
가미야 미에코 神谷美惠子.
일본의 정신과 의사, 교수, 시인, 작가, 번역가. 한센병 환자에 관심을 기울였다. 유산 후 우울증에 빠진 미치코 왕비의 상담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저서. 『마음의 여행』, 『인간을 바라보며』 등.
홍성민. 성균관대학교 졸업. 일본 교토국제외국어센터 일본어과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