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이 책은 일본인 저자가 1979년 1년 동안 서울 건국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외국인 교사로 체류했던 시기에 보고 들은 경험에 의지하여 논픽션과 적당한 픽션이 혼합된 소설이다.
2024. 12. 03. 대한민국 윤석렬 대통령은 계엄을 선포했다. 국회에서 계엄 해제 의결에 따라 3시간 만에 해제하였다. 나는 그 시간에 자고 있었다. 잠자던 사이에 일어난 계엄이 나에게 미친 영향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 후가 문제다. 정국은 급격히 소용돌이에 빠져들었고 국방부장관이 계엄 세력으로 체포 구속되었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정국이 이어졌다. 국무총리가 대통령권한대행이 되었고 그마저 며칠 가지 못하고 탄핵되었다. 사유는 그동안 민주당이 방통위원장 탄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추천을 미뤄왔던 헌법재판관 임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대한민국은 탄핵 반대와 찬성으로 갈렸고 나라는 남북에 이어 탄핵 찬반으로 찢어졌다.
작가는 스물두 살에 한국 대학에 일본어 원어민 강사로 부임한다. 학생들과 비슷하거나 어린 나이다. 한국에 사는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일본인은 생소하다. 특히 징병제도에 관해 이해하지 못한다. 강의실에서 강의를 받던 학생이 어느 날 군에 입대해서 안보이고, 군에서 제대한 학생이 복학해서 강의를 듣는 광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이 1970년대 후반 작가가 경험한 대한민국 학생들과 서울에서 생활, 영화 구경, 음식점, 아파트, 통행금지, 당시 장발 단속 같은 것이다. 칠십년대 후반의 광경이 새삼 회고된다. 1년 동안 한국 생활은 작가에게 많은 궁금증이 생겼다. 국가란 무엇인가. 군대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무엇인가. 역사와 언어의 기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뇌리에 끊임없는 물음표를 만들고 있지만, 일본에서 관심 없는 주제일 뿐이었다. 계엄에 관한 내용은 말미 몇 페이지에 불과하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발생했고, 계엄이 선포되고 작가는 한 달여 후에 일본으로 귀국한다.
1979년 박정의 대통령이 암살되자 공포로 가득 찬 유신체제는 일단 종결을 고하는 듯했다. 암살자 김재규는이듬해 처형됐고, 모든것이 봉인됐다. 1980년 2월 ‘서울의 봄’이 찾아온다. 김대중을 포함한 687명의 정치범이 공민권을 회복했다. 3월 대통령긴급조치로 대학에서 제적 또는 해직되었던 학생과 교수들이 돌아왔다. 이어진 민주화 투쟁으로 1980년대 한국은 최루탄과 시위대의 함성으로 이어졌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원초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는 것을 오늘 소설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조선시대 훈민정음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양반 계급의 심정을 알게 됐다. 자기들만 알아야 할 글자를 전 국민이 알게 되면 힘들게 공부한 것이 평준화되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개나 소나 아는 것을 내가 안다고 자랑할 수 없는 것이다.
양반만 알아야 할 문자를 평민과 상놈이 다 알 수 있게 한다고 하니, 그것도 왕이 그런 것을 만들겠다고 하니 이런 천지개벽할 일이 있을 수 있나? 이 소설을 읽으면서 유학을 갔다 온 여자가 일본인 교수를 만나 하는 말이 “영어와 프랑스어 어느 쪽으로 말하는 편이 좋겠냐?”라고 묻는다. 일본인 교수는 영어나 불어 실력이 비슷하니까 “아무거라도 상관없어요.”라고 대답한다. 외국어, 아무나 할 수 없는 언어다. 그러기 때문에 대학에서 전공과목이다. 누구나 외국어를 할 수 있다면 조선시대 훈민정음을 만든 것과 같을 것인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에 사는 일원으로서 유사 이래 수백 번의 외침을 당하고 수모를 겪으면서 다시 또 그런 역사가 반복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고 부끄러울 때가 많다. 그런데 세계 우위의 교육열로 고등교육을 받은 국민 의식 수준이 높아졌음에도 지금도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요즘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비참함을 느낀다. 내가 살아온 조국, 그리고 후손이 영원히 살아가야 하는 조국 대한민국은 왜 국민이 서로 보듬고 격려하며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기보다 서로 헐뜯고, 자기만 출세하고 행복하기 위해 남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다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특히 작금이 정치 상황을 보면 한심함을 넘어 당하는 국민으로서 괴롭다.
“한국인한테 가끔 보이는 격정은 나를 놀라게 했다. 그들이 급하게 술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배후에 전 세계를 둘러싼 우울한 감정에 겹겹이 쌓이고 포개진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되도록 관찰자 영역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강인한 힘으로 낯선 한국인들의 취기에서 나오는 자기력에 휘말리는 일도 있었다.” 저자가 본 한국인의 모습 한 부분이다.
국가 소멸이란 이와 같은 일이리라. 백제가 멸망했을 때 침략자인 당과 신라의 병사들은 궁전과 사찰을 불태웠을 뿐만 아니라 금은보화와 궁녀까지 철저하게 약탈했다. 손가락 하나 크기밖에 되지 않은 불상을 바라보며 짐작했다. 부여는 이 작은 불상을 감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리라.
2000년의 일이었다. 나는 서울 중앙대학교 초청으로 다시 한번 객원교수로 한국을 찾았다. 첫 방한으로부터 2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서울을 크게 변모해 있었다. 강남, 한강 남쪽으로 신시가지가 크게 발전했고 과거 알던 거리는 완전히 위축되어 구시가지가 되었다. 지하철이 곳곳으로 뻗어나갔고 고가도로를 없애는 계획이 입에 오르내렸다. 오랫동안 지하에서 흐르던 청계천이 다시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이미 거리에서 군대 색채는 사라졌다. 예전에는 골동품 가게와 고서점이 수십 개 차지했던 인사동 거리는 하나의 거대한 기념품 거리가 되어 수많은 일본인 관광객을 불러 모았다.
지금 대한민국이 사태를 보면서 베트남이 떠오른다. 월남패망 후 조사한 바에 의하면 패망 당시 월남 정부, 언론, 종교, 문화계 등 사회 각계각층 전반에 월맹에 동조하는 세력과 간첩이 활동하였다고 한다. 정부 핵심 요직인 부통령마저 월맹의 간첩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니 미국이 그 많은 인력과 자원을 지원해도 망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의 현실과 기시감이 생기는 이유는 뭘까? 혹시 대한민국도 월남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암울하다.
『계엄』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한정림 옮김. 2024.10.14. 정은문고. 303쪽, 21,000원.
요모타 이누히코 四方田犬彦. 비평가, 시인. 1953년 오사카부 미노시 출생. 도쿄대학에서 종교학, 같은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했다. 메이지가쿠인대학, 컬럼비아대학, 볼로냐대학, 텔아비브대학, 중앙대학교, 칭화대학(타이완) 등에서 영화사와 일본 문하론을 가르쳤다. 저서. 『영화사로의 초대』, 『서울의 풍경-기억과 변모』 등.
한정림. 이화여자대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일본어교육원에서 통번역 공부. 「여성신문사」 기자. 영상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