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짓는 까치, 가족을 짓는 관식이
지난 주말, 대학로 뒷골목을 걷다 머리 위로 툭하고 잔가지 하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뒤이어 툭툭...
두서너 개의 잔가지가 떨어지고 나서야 머리를 들어 올려다봤다. 낡은 전봇대 위에 까치 두 마리가 열심히 집을 짓고 있었다.
시골 풍경 속, 높이 뻗은 나무 위에 소품처럼 걸려있는 새집을 간혹 보긴 했지만, 낡은 도심 한가운데서 열심히 집을 짓고 있는 까치 부부를 만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시선을 따라 내려가니 둥지 밑에는 잔가지들이 수북이 떨어져 있었다. 때마침 가지 하나가 위태롭게 걸린 몇 겹의 전선을 툭툭 건드리며 떨어진다. 괜찮은 걸까? 걱정이 무색하게 두 마리의 까치는 꽤나 부지런하게 집을 짓고 있다.
좁고 낡은 도심의 골목, 회색빛 전봇대와 아무렇게나 얽힌 전선들이 아찔한 그곳에서 두 마리의 까치는 희망차게 새 집을 짓고 있었다. 마치 새 살림을 시작하는 가난한 젊은 부부의 앳된 성실함을 보는 기분이었다.
위태로운 현실에서도 부지런히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까치의 모습에 왠지 모를 뭉클함이 찾아왔다. 바닥에 쌓인 무용한 나뭇가지들이 그리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몇천 번의 날갯짓과 수백, 수천번의 수고로움이 생각났다. 떨어진 나뭇가지만큼 집어삼겼을 실망도 떠올랐다. 하지만 머리 위 까치들은 계속 열심히 짓고만 있었다.
주변에 성실한 사람들이 있다. 묵묵히 감당하고 조용히 그것을 해내는 사람들, 한결같은 강도로 굴곡 없이 그것을 처리하는 사람들, 외부 환경에 영향받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불만을 말하기보다 오늘의 일을 한다. 그들의 성실은 빈 곳을 채우고, 메꾼다. 하지만 그들이 채우는 빈 곳은 원래 채워져 있던 것처럼 티 나지 않는다. 그들의 부재 시에만 우리는 알 수 있다.
성실함은 그런 것이다. 가지가 떨어져도 다시 날아가 물어오고, 쌓고, 쌓고, 쌓고... 그럼, 어느새 봄이 가기 전 둥지가 완성되는 것, 낡고 위태로운 현실 속에서도 끝끝내 자신만의 안식처를 만드는 것이 성실함의 힘이다.
난 열심히 사는 사람이지만 성실하지는 않다. 나에게도 한결같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에너지의 양을 동일하게 유지하지 못하고, 기복에 익숙한 성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나의 만약 중에 성실했었더라면, 더 많은 것들을 이루지 않았을까라는 가정은 항상 옳다.
그래서 난 성실한 사람들이 좋다. 한결같고, 기복이 없으며, 묵묵히 채우는 사람들.
최근 시청하고 있는 국민 드라마인 넥플릭스의 '폭싹 속았수다'에 대표적 성실 캐릭터가 나온다. 바로 박보검이 연기하는 관식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애순이 곁을 지키고, 애순이를 성실하게 사랑한다. 한결같이 바라보고, 동일한 온도로 따뜻하게 사랑하며, 묵묵히 지킨다. 주어진 일은 성실히 하며, 상처가 나도 일이 고돼도 끝내 해낸다. 성실함으로 한 여자를 사랑하고, 가정을 지키고, 인생을 살아간다. 애순이 대학 보낼 돈도, 집 얻을 돈도 없고, 노스탤지어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성실함이 있다. 결혼한 지 수년이 지나도 아내에게 핀을 선물하는 성실한 낭만이 있고, 온갖 모욕을 견디며 일하고 돈을 버는 성실한 책임감이 있다. 모진 자신의 엄마와 할머니로부터 애순이와 가정을 지키는 성실한 가족애도 있다.
이 사회는 시끄러운 사람들에 의해 돌아가는 것 같아 보인다. 팔에 보란 듯이 완장을 찬 학씨같은 사람들이 끌고 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사회는 수많은 관식이들이 성실히 맡은 자리에서 그 삶을 살아준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슬아슬한 전신주 위에라도 집을 짓는 까치처럼 그렇게 위태함 속에서도 제 몫을 살아내는 이들이 제 알을 낳고, 부화하며 역사를 이어온 것이다. 요즘처럼 시끄러운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고 집을 짓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떨어지는 가지가 태반이더라도 가지를 물어와야 한다.
그래야 봄이 되기 전에 집을 지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알을 낳고, 새 생명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우리 삶에 성실함의 힘을 믿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