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과사색 May 24. 2022

심리 상담 첫번째 이야기:무기력이 지배하는 일상

에린과의 첫 번째 만남: 생산적인 하루를 만드는 방법들

2022년 1월 4일. 심리 상담가 에린과의 첫 번째 만남.


“하루하루를 그냥 멍하니 보내는 것 같아요. 그냥 껍데기만 살아있을 뿐, 알맹이는 없는 기분이랄까요. 그냥 오늘도 눈을 떴으니 하루를 사는 거예요. 아무런 기쁨도 즐거움도 없고… 몸이 살아서 기능을 하고 있으니, 단지 그거에 충실에서 살 뿐이에요. 예를 들어 배가 고프다고 하니 밥을 먹여주고, 졸리다고 하니 잠을 재워주고… 껍데기만 남아서 살고 있어요.”


“그렇군요. 이런 기분을 느낀 지 얼마나 되셨나요?”


“5년 전부터요. 그런데 이렇게 심해진 건 1년쯤 된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줄 수 있나요?”


“음… 사실 제 예전 직업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아요. 그때는 제가 병원에서 재활 치료사로 일을 했어요. 남을 도와주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해서 그 직업을 선택했고, 공부를 하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몰라요. 내 기준에서 최고로 가치 있는 일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며 산 거잖아요. 본인의 가치관을 실천하면서 사는 일이 얼마나 뿌듯하고 멋있는 일인데요. 그런데 어느 순간 회의감이 들었어요. 남을 돌보느라 제가 너무 소모되고 있었어요. 환자를 보는 일이 너무 지치더라고요. 특히 정신적으로요. 저한테 쏟아내는 불평과 불만을 들어주는 것이 힘들었어요. 사실 그게 저를 향한 것은 아니었어요. 보통 본인들의 힘든 삶에 대한 토로를 했는데, 그럴 때마다 감정 이입이 많이 됐어요. 그러니 제 감정이 힘들고 버거워지더라고요. 왠지 그들이 힘든 이유가 제가 제대로 치료해주지 못해서 그렇다는 자괴감도 들었고요. 제 탓이 아닌데 제가 다 떠안고 고쳐주려고 했던 것이 저를 지치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어요."


“그랬군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상처를 받거나 지치게 된 것 같네요."


“맞아요. 사실 지금 생각해 봐도 제가 상처를 받았던 건지 지쳤던 건지, 아직도 정확히 어떤 마음이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저 제가 소모되고 고갈되고 있었다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겠어요. 남을 돕는 일이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저에게 의미를 가져다 주진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가치와 의미는 같은 것이라고 착각했거든요. 그런데 가치와 의미가 분리된 순간, 제 삶의 가치관도 잃고 방향성도 잃었어요. 남을 돕는 것처럼 가치 있는 일도 저에게 의미를 주지 않는데, 그럼 도대체 저는 어떤 일에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건지… 위선자 같아서 제 자신에게 실망스럽기도 하고… 의미 있는 일을 못 찾고 있어서 막막하고 절망스러웠죠.”


“혹시 그것이 보건 역학 대학원에 가게 된 계기였나요?”


“네 맞아요. 아예 정 반대로, 나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공부와 연구만 하면서 살겠다고요. 그래서 박사 학위를 따고 좋은 연구를 하는 것을 제 직업으로 삼으면 알맹이가 채워질까 했던 거죠.”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너무 씁쓸하지만 박사를 안 하기로 했어요. 석사만 하고 졸업했어요. 석사 하는 동안 새벽 네시 전에 자본 날들을 손에 꼽는 것 같아요. 공부할 것도 너무 많고 과제도 매주 세네 개씩 있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학생으로 돌아가서 그런지 더 힘들게 느껴졌어요. 저녁이 있고 주말이 있던 삶을 살다가, 새벽까지 주말도 없이 공부해야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석사 하는 동안은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지만, 박사 공부하면서 이런 식의 삶을 4-5년 동안 살 엄두가 안 났어요. 게다가 저는 5년 후 박사 학위를 받으면 나이 마흔이 될 텐데, 제 인생의 30대 중 후반에 새벽까지 공부만 하는 것은 제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적합하지도 않았고 시기에 맞지도 않았어요. 제 가슴을 뛰게 하는 일도 아니었고요.”


“큰 결정을 내린 거였네요. 아쉽지는 않았나요?”


“정말 많이 아쉬웠죠. 애초에 커리어를 바꿀 때 연구를 직업으로 삼을 계획이었거든요. 그래서 큰 마음먹고 박사까지 할 목적으로 들어갔던 석사 프로그램인데, 중간에 포기한 느낌이 들어서 제 자신에게 실망스러웠어요. 이러려고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 온 게 아니었잖아요. 또다시 삶의 목표와 방향성을 잃은 것 같았어요. 자꾸만 실패하는 것 같고 인생이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 같아 원망스럽고 막막했어요. 다시 삶을 어떻게 일구어야 하는지 커리어는 어떻게 쌓아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역학 전공을 한 것도 연구를 하려고 택한 거였지 직장을 구하려고 택한 전공이 아니었어요. 도대체 이 전공으로 무슨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하는지 까마득했어요. 저는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고 제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면 했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못 찾겠어서 '또 전공을 잘못 선택했구나, 나는 계속 실패하는 선택만 하네'라는 생각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어요.”


“그랬군요. 변화를 도모하려고 무언가를 시도할 때마다 계획대로 안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겠네요. 지금은 직장을 구한 상태죠? 하는 일은 어떠세요?”


“바로 이게 문제예요. 지금 제 직업이 너무 싫어요. 하필 코로나가 닥치자마자 졸업을 하는 바람에 취직이 정말 힘들었어요. 원서를 아무 데나 100개는 넘게 넣었는데 오퍼 받은 곳이 여기 한 군데였어요. 제가 원하는 직업은 아니었지만 일단 월급을 받고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일도 너무 단순하고 지겹고, 보람도 없고, 월급도 적고, 미래도 보이지 않아요. 제가 이러려고 석사 대학원을 또 들어간 게 아니잖아요. 그러다 보니 불만이 많죠.”


“그렇죠. 보상을 제대로 못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겠어요. 하루 일과에 대해서 더 얘기를 해주시겠어요?”


“데이터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데,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요. 아침에 10시쯤 겨우 일어나서 그날그날 시키는 일 몇 개 하면서 시간을 때워요. 루게릭병 임상 실험에 참가하는 피실험자의 데이터를 관리하는데, 일 자체가 너무 쉽고 단순해요. 제 전공과 아무런 관련도 없고 중학교만 졸업해도 할 수 있는 일 같아요. 그래서 더 지루하고 제가 하는 일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저에게 아무런 흥미도 즐거움도 보람도 주지 않아요. 생산적이고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정 반대예요. 대부분의 시간은 멍 때리면서 보내고 실패자 같다는 생각에 젖어 살아요. 제 하루하루가 죽어있는 것만 같아요.”


“듣고 보니 왜 무미건조한 하루들을 보내고 있다고 얘기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 상원 씨에게 있어서 일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연결되는 중요한 일처럼 보여요. 그리고 세상에 도움이 되고 가치 있는 일이어야 하고요. 그런데 현재 하고 있는 일이 그런 부분을 채워주지 않는다면, 당연히 하루하루가 의미 없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겠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과 그 일을 하면서 성장하는 것은 삶의 중요한 요소예요. 그래서 조금 어렵다고 생각되는 일들에 도전하고 배우면서 스스로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필요해 보여요. 지금 하는 일이 단순하고 쉬워서 배울 것이 없다고 느껴지면, 도전할 수 있는 분야로 이직하는 건 어때요?”


“네 맞아요. 정말 맞는 말씀이에요. 제가 도전하고 더 배울 수 있는 직업이 제게 더 맞아요. 그래서 데이터 분석이나 데이터 사이언스 쪽으로 이직을 준비하고 있어요. 6개월 안에는 이직이 됐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아무 의미도 못 느끼고 껍데기만 남아서 살고 있는 느낌이 정말 괴롭거든요. 그런데 제 하루하루가 너무 침체되다 보니까, 이직 준비하는 것도 제대로 못 하고 있어요. 에너지가 없어요. 의욕이 떨어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침 10시에 겨우 일어나서는 낮잠만 세 번을 자요. 미치겠어요. 늘 졸리고 늘 피곤하고 늘 멍하고... 이런 일상이 반복될수록 제가 더 싫어져서 더 무기력해지고 다 귀찮고 짜증이 나요. 악순환이에요.”


“이직할 계획이라니 정말 잘 생각하셨어요. 변화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첫 단계인데, 지금 그 단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직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지금 현재의 무기력함 때문에 이직을 위해 쏟을 에너지조차 없는 상황 이잖아요. 그래서 일단은 하루하루를 생산적으로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두 가지 방법을 알려줄게요. 첫 번째로는, Behavioral activation activity diary (행동 활성화 일지)를 쓰는 거예요. 혹시 들어본 적 있나요?”


“아니요. 처음 들어봐요”


Behavioral activation activity diary (행동 활성화 일지)는 하루 동안 해야 하는 일들을 정해서 실천하는 일종의 생활 계획표 에요. 규칙적인 시간에 규칙적인 일들을 하는 것이 안정적인 생활을 되찾는데 큰 도움이 돼요. 예를 들어, 부모들이 갓난아이를 키울 때를 생각해 보세요. 갓난아이들은 밥 먹는 시간, 낮잠 시간, 밤에 자는 시간들이 정해져 있고 부모들이 최대한 그 루틴을 따르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는 것은 사람에게 일상의 안정을 주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그런 규칙적인 생활에서 점점 벗어나기도 해요. 정해진 시간에 아침밥을 먹고,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일상이 흔들려요. 우리는 가장 기초로 다시 돌아가야 해요. 규칙적인 시간에 기상하고, 식사하고, 취침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해요. 일상을 되찾는 가장 첫 번째 단계이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듣고 보니 그렇네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도 중구난방이고, 밥을 먹는 시간도,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제 멋대로예요. 이렇게 규칙도 없는 망가진 하루를 지내면 기분이 영 좋지 않아요.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봐요.”


“맞아요.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무기력하고 게으르다고 느껴질 땐, 하루를 생산적으로 보냈다는 느낌을 되찾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서 아침, 점심, 저녁 별로 실천할 수 있는 한 두 개의 작은 과제들을 정해 놓고, 실제로 그것들을 실천해 나가면서 성취감을 느껴야 해요. 거창한 목표부터 시작하면 실천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니까, 정말 작은 과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아요. 예를 들어 ‘아침에 꼭 아침밥 먹기’ 혹은 ‘저녁에 10분 동안 산책을 하기’처럼요. 제가 예시가 있는 자료를 보내줄 테니까 한번 보고 따라 해 보세요.”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두 번째는, 포모도로 기법이라고, 실제로 일을 할 때 능률과 효율을 높이는 데 도움이 돼요. 방법은 매우 간단해요. 일을 하는 시간과 휴식 시간에 알람을 설정해놓고, 그 시간에 따라 규칙적으로 일을 하고 쉬는 거예요. 예를 들어 25분 동안 일을 하고 5분 동안 쉬고 싶다면, 알람을 25분 후, 5분 후로 반복해서 설정해 놓는 거죠. 포모도로 타이머 어플도 많으니, 한번 시도해보세요.”


에린은 휴대폰이나 컴퓨터에 다운로드할 수 있는 포모도로 타이머 어플을 몇 개 추천해주었다. 그리고 behavioral activation activity diary (행동 활성화 일지) 샘플을 보내 주었다. 겨우 한 장 밖에 되지 않았고, 매우 간단해 보였다.



https://brunch.co.kr/@5b99714b79f941d/4

https://brunch.co.kr/@5b99714b79f941d/8


이전 01화 내 인생이 잘못된 것 같은 느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