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었다.
달빛은 조용히 내려와
그의 흔적을 비췄다.
수북이 쌓인 이름표 더미,
이름마다 해묵은 감정들이 눌어붙어 있다.
햇살처럼 번지던 미소,
말하지 못하고 삼켜버린 분노,
장대비처럼 쏟아지던 눈물,
기뻐 춤추던 순간들.
사랑했고, 미워했고,
용서했던 마음의 조각들이
이름 사이사이를 메웠다.
떠나려는 그에게
미련은 덩굴처럼 엉켜 붙어 그의 발을 감았고,
그는 천천히 매듭을 풀었다.
가벼워진 몸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바람이 불었고,
바람은 모든 것을 흩날려 버렸다.
달빛 아래, 그 자리에 남겨진 국화꽃 한 송이.
“그거면 되었다.”
그는 미소 짓고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