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한 온도, 적정한 거리
얼마 전 유심 교체를 위해 집 근처 대리점을 방문했다.
나온 김에 점심을 먹기로 하고 김치찌개집으로 향했다.
요즘 갱년기가 와서 수시로 땀이 나는데,
밥을 먹으면 거의 폭포수처럼 흐른다.
밥을 먹다가 진이 빠질 정도다.
메뉴가 메뉴다 보니 땀을 뻘뻘 흘리며 찌개를 먹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이런 나를 보고
내 쪽으로 선풍기도 틀어주시고, 에어컨 온도도 낮춰주신다.
단골 가게도 아니었고 자주 들르는 가게도 아니라
그냥 손님 중 한 사람인 나를 유심히 보시다
선풍기도, 에어컨도 만져주신 거다.
그 마음이 느껴져 감사했다.
손님 하나하나 살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사장님의 따뜻한 마음과 시선을 선물 받은 나는
덕분에 그 온도만큼 시원하게 식사를 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누구를 보느냐 누구와 함께 하느냐만큼,
누가 보느냐, 함께하는 내가 어떠냐도 중요하다고.
어떤 시선으로 상대를 보느냐도 중요하다는 거다.
상대를 보는 나의 온도가 어떤지,
상대를 어떤 시선과 관점으로 보는지도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아닐까?
상대뿐 아니라 보는 내가, 함께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다는 거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시간과 공간은 원래 있고
인간이 그 시간과 공간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 아닐까?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 만큼,
그 사람의 존재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종종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나만의 시선과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
진실과 관계없이
내가 보는 세상이
나의 진실이 되고 의미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수많은 오류를 발생시킨다.
내가 경험하고 아는 한도 안에서만 모든 것을 판단하고,
이성적 판단이나 객관적 검증 없이 세상을 본다면
우리가 보는 세상은 왜곡된다.
내가 보고 싶은 하나의 조각, 단편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우리 모두 암암리에 인식하고 있음에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크게 거리낌이 없다.
가장 가벼운 망상의 단계는 ‘편견’이다.
내가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볼 때
스스로가 정한 한계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망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한계를, 편견을
자신만의 잣대로 타인에게 멋대로, 마음대로 적용하곤 한다.
그 와중에 타인을 바라볼 때, 문제점을 찾을 때는
지나치리만큼 자세히 하나하나 뜯어본다.
세밀한 것 하나까지 살피며 오류와 문제를 찾고 또 찾는다.
상대에게 높은 잣대를 들이대며,
비난받을 타당한 이유를 몰두해 찾는 경우도 왕왕 발생한다.
반대로 자신을 바라볼 때는 더없이 느슨한 시선과 태도로 바라본다.
그럴만한 이유를 뒤지고 뒤져서 찾아낸다.
그럴 수밖에 없는 합당한 이유를 어떻게든 끌어와 들이댄다.
애초에 공평하지 않은 게임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이런 상황이 반대로 된다면... 어떨까?
아마도 가혹하게 느껴지고 잔인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세상을 바라볼 때, 타인을 바라볼 때 우리의 시선은 어떠한가?
따뜻한가? 느슨한가? 엄격한가? 공평한가?
내가 사는 세상은 나를 둘러싸고 상호교류를 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내가 세상을 너른 마음과 따뜻한 시선과 느슨한 태도로 바라봐 줄 때,
세상 또한 내게 같은 방식으로 돌려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듯이,
가는 시선과 태도가 고와야 돌아오는 마음도 곱지 않을까?
이전의 나도 편협한 생각과 시선으로 타인을 힘들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내가 잘못된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한다.
내가 세상과 부딪쳐 문제가 발생할 때,
벽에 부딪힐 때,
내가 바라본 시선이·판단이 온전했는지!
내가 잘못 바라본 것이 무엇인지 먼저 되새겨 보려 노력한다.
내 입맛에 맞춰 옹졸한 마음으로
상대를, 세상을 바라본 건 아닌지 되돌아본다.
부족하고 모자란 것이 많아서,
살아온 세월이 짧아서, 배우고 본 것이 적어서,
내가 보는 세상은 나로 인해 한계가 지어져 있다.
그로 인해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것만큼만, 아는 것만큼만 보인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내보내는 모든 말과 행동들은
결국 내 안에서 소화된 만큼만 분출되고 표출된다.
내가 안다고 믿는 것들, 내가 소화시킨 것들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의심해야 한다.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하고, 잘못 알고 뱉은 말과 행동이
상대를 상처 줄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한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가 알고도 모르고도 서로의 지옥이 되는 불찰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인생과 삶에 과하게 관심을 갖고 자신이 믿는 신념을 밀어붙이지 말자.
우리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사소한 것엔 사소한 만큼의 관심과 시선을,
중요한 것엔 그에 합당한 무게와 책임을 묻는 것이
균형이고 순리이며 합리적인 게 아닐까?
지금 우리는 각 개인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고, 너무 많은 제재를 가한다.
그게 타인일 경우 그 잣대가 심히 가혹하다 느낄 만큼 엄격할 때도 있다.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어차피 크게 신경 쓸 것도 아니고
금세 잊어버리고 말 일에 기를 쓰고 문제를 들이대고 말로 사람을 때린다.
하나하나 뜯어보고 살펴보려면 그 거리가 너무 가깝다.
내 시간과 노력을 그 사람에게 딱 붙어 소비하며,
내 마음과 상대의 마음을 괴롭히려 애쓰는 것이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틀에 맞추고
자신의 기준에 맞추려 들고 문제시한다면,
결국 상처는 다른 사람과 맞춰 가려 노력하는 사람들만 받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이렇게 타인을 대한다면,
나 자신도 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언제 내가 그 상대방이 돼서 같은 입장에 설지 알 수 없다.
러시안룰렛을 돌리듯 내 차례가 오면 묵묵히 맞아내고,
버텨내야만 하는 '데스게임'이 되고 만다.
멀리 너그럽게 상대를 보면 나도 자유롭다.
상대와 나 모두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가 조금 더 숨 쉬고 살만한 세상이 되려면 나부터 변화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정한 거리와 적정한 온도가 필요하다.
너무 뜨거워도 너무 차가워도,
누군가는 데거나 누군가는 마음을 다쳐 얼어붙고 만다.
따뜻한 시선은 따뜻한 마음이 되고,
따뜻한 마음은 전파력이 높다.
어차피 태어나버린 세상!
다른 사람을 헐뜯고 할퀴며 사는 선택보다,
함께 보듬으며 사는 선택을 한다면 어떨까?
태어나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지만,
사는 방식은 우리가 정할 수 있다.
우리에겐 그만한 능력과 이성과 지성이 있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해답을 찾고 실천하고 행동할 능력이 우리에겐 무궁무진하다.
우리의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주 사소한 노력에서 시작된다.
그 사소한 노력이 나비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고,
세상을 변화시킬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누군가 내게 잘해주기만을 기대하지 말고,
내가 먼저 잘해준다면 우리 모두 함께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사진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