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피고, 시간은 저물고

봄의 시작에서 세월을 생각하다

by 멈춤의 일기장

고기와 야채를 정성껏 섞어 섞어 노오란 치마저고리를 입히듯 지글지글 부쳐낸다.
개나리가 밥상 위에 피어난 듯 흐드러진 한 상이 차려진다.
어른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술잔이 오가고, 아이들은 노래방으로, 친구를 만나러 각자의 시간을 즐기러 흩어진다.


적당히 먹고 마신 뒤, 종일 걷지 못해 찌뿌둥해진 몸을 풀겠다며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는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화단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니,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 아래 홍매화 꽃봉오리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장면도 아닌데, 새삼 경이로웠다.
붉은 매화 봉오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 붉은빛을 가슴에 담고 집으로 들어왔다.


다음 날 아침, 떡국에 만두를 넉넉히 넣어 푸짐하게 상을 차렸다.
어른부터 차례로 세배를 받고, 세뱃돈을 손에 쥔 아이들은 들뜬 표정으로 웃는다.
며느리들 고생했다며 팔순이 넘으신 시어머니는 신사임당이 그려진 노란 지폐를 한 장씩 쥐여 주신다.
나이가 들어도 돈을 받는 일은 여전히 기분을 좋게 한다.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며 조만간 또 뵙겠다 약속하지만, 발걸음은 어딘가 아쉽다.


어젯밤 보았던 홍매화가 떠올라 다시 화단으로 향했다.
밤에 본 봉오리와 낮에 보는 봉오리는 정취가 전혀 다르다.
돌아서려는 순간 형님이 나를 부른다.


“동서, 여기 좀 봐봐.”


다가가 보니 수선화가 움이 텄고, 그 뒤로 튤립도 작은 숨을 틔우고 있었다.
새순과 꽃봉오리를 마주하니 기쁘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짠하기도 하다.
꽁꽁 언 땅을 언제 헤치고 나왔을까.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일까.
조용히 가슴에 다시 담는다.


팔순이 넘으신 작은아버지는 재작년 여름 먼저 떠나신 작은어머니 이야기를 자주 꺼내신다.
암투병으로 오래 고생하시다 가셨기에 아직도 마음이 아프시다며 눈시울을 붉히신다.
운동하시며 건강하게 지내셔야 한다 말씀드리면, “그래, 그래…” 허허로운 대답만 되돌아온다.


명절이 늘 즐겁기만 하면 좋으련만, 나이 드신 어른들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저 건강하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짠해진다.
세뱃돈에 기뻐하는 아이들 뒤로, 서서히 저물어 가는 어른들의 시간이 겹쳐 보인다.
언젠가 나에게도 올 시간이라는 생각에, 설명하기 힘든 서글픔이 조용히 스며든다.


그래도 봄은 오고 있었다.
홍매화는 피고, 수선화는 움을 틔우고, 튤립은 흙을 밀어 올린다.
시간은 그렇게, 기쁨과 서글픔을 함께 데리고 흘러간다.


이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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