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간을 지나 여기까지
주말이 되면 우리 집의 두 남자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아침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골프백을 메고 스크린 골프장으로 향한다.
아들은 아빠의 자세를 교정해 주고,
아빠는 열심히 아들의 말을 경청하며 따라 자세를 취한다.
회사 동료들과의 라운드에서 지지 않으려,
남편은 주말마다 아들에게 레슨을 받는다.
그 모습을 보면 지금은 참 좋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기까지의 시간이 떠오르면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먹먹해진다.
나는 아이 둘을 모두 수술로 낳았다.
아들이 태어났을 때 병원에서 집게로 들어 올리다가 아이를 떨어뜨렸다고 했다.
수술 때문에 아이를 4일 만에 보았는데 겉으로는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퇴원할 때 신생아 사진이 없다고 했다.
카메라가 고장 났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아이를 자세히 보니 코와 미간 사이에 초록빛 멍이 있었다.
그때 알았다.
혹시 모를 의료 소송을 피하려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그것도 누구나 알 만한 대학병원에서.
아이는 잠시도 누워 있지 못했다.
나는 아이를 가슴에서 떼어 놓지 못했다.
태아 때처럼 엄마 심장 소리를 들으면 괜찮아질 것 같아서
아이 얼굴을 가슴에 대고, 등에 쿠션을 받쳐놓고 살았다.
백일쯤 되어서야 아이는 조금 안정을 찾았고
나도 누워서 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커가면서도 잔병치레가 많았다.
주변 도움 없이 아이 둘을 키우던 나는
산후우울증과 온몸의 염증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남편은 그저 가족을 굶기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하루 24시간을 회사에 바치고 있었다.
해외 출장도 잦았고,
아들은 아빠만 보면 낯선 사람 보듯 울었다.
아이가 36개월이 되었을 때
나도 이제는 좀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내 눈을 피하고 마주 보지 않았다.
눈동자가 한쪽으로 쏠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나 살자고 저 아이를 망쳤구나.’
3개월 만에 일을 접고 전업주부로 돌아갔다.
딸은 “엄마 돈 벌러 가지 마”라고 말하며
내심 자신도 엄마가 필요함을 피력하고 있었다.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아이의 성적을 걱정했다.
나는 그 간의 상황을 설명하며 말했다.
“성적은 다 필요 없습니다.
아이들과 잘 지내는지만 봐주세요.”
그저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건강하기만을 바랐다.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내가 지칠 때면 딸이 그 자리를 채워주었다.
지금도 가끔 딸에게 고맙다고 말을 한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즈음
아이는 정서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나는 처음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아빠와는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남편이 한참 빠져 있던 골프를
아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둘은 가끔 스크린 골프를 다니기 시작했고,
5학년이 되었을 때
아들은 프로에게 “아빠를 한 홀만 이기게 해 달라”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 일을 계기로
아들은 골프를 전공하게 되었고
지금은 아빠가 아들에게 레슨을 받는다.
오늘 아침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옛날 생각이 밀려왔다.
그때 얼마나 서럽고 힘들었는지가 떠올랐다.
남편도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다 잊힌다.
어쩌면 잘 잊어서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좋다.
그냥 좋다.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