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에 관하여

by EJ

고통은 유일한 의식의 근원이다

- ‘죄와 벌’ 중에서 / 도스토예프스키




생각 하나. 매번 삶의 우산을 지참할 수는 없습니다



인과(因果)의 연결을 가끔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 이런 행복은 없었을 텐데…. 그때 그 일만 아니었다면 지금 이런 아픔은 없었을 텐데…. 우리의 마음을 더욱 미소 짓게 또는 씁쓸하게 만드는 것은 그 결정적인 순간들이 적어도 겉으로는 꼭 그래야 할 숙명적인 이유가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능력으로는 인과의 흐름 속에 일어나는 그 모든 세세한 사건들을 통제할 수 없기에, 우리들은 그저 수용하고 살아가면서 가끔 창밖을 바라봅니다.

비가 내립니다. 무심코 집을 나섰다가 다시 우산을 가지러 집으로 들어서고 그사이에 늘 타고 다니던 시간대의 버스는 떠나갑니다. 다음 버스 안에서 우연히 들려오는 라디오 속 누군가의 스쳐 가는 한마디가 어쩐지 내 마음에 깊숙이 담기고, 이것이 내 삶의 방향타가 되어 버립니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운명처럼 내 것이 되기 위해서 비가 내렸을까….

알 수 없는 인과의 흐름이 좋은 열매를 맺어줄 때는 우리는 그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 되지만, 때로는 아니 훨씬 더 많은 경우에, 좋지 않은 결과를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다가 우리는 뜻하지 않은 비를 맞게 됩니다. 그저 일상을 적시는 가랑비일 때도 있지만, 가끔은 생애를 가누지 못하게 퍼붓는 폭우에 흠뻑 젖기도 합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어떻게든 폭우를 피할 수 있었다고 가슴을 치지만, 이미 비는 먼 과거 속에서 내 온몸을 흠뻑 적시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끔히 갠 하늘 속으로 자취를 감쳐버렸습니다.


언제 또 비가 내릴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매번 우산을 지참하고 다니지는 못할 것입니다.




생각 둘. 그늘



커튼을 여니 밝은 햇빛이 실내로 들어옵니다. 뒤돌아보면 커튼을 열기 전에는 몰랐던 먼지가 빛 속에서 아른거립니다. 그 모습을 한참 보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그늘이 진다고 해서 그 먼지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으면 일단 마음은 편안해집니다. 너무 밝은 삶 속에서는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권태일 수도, 무미건조일 수도, 때로는 침울일 수도 있습니다. 침울이 반드시 그늘 속에서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한편 우리 삶에 그늘이 드리워지면 처음에 그 그늘의 무게에 힘겨워하지만 이내 빛을 찾아 나서려는 힘이 생기고 그것은 권태와 건조함, 침울을 모두 물리쳐 줍니다. 그늘 속에서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그늘은 때로 삶을 돕기도 합니다.




생각 셋. 꿈이 꿈인지 모르듯 삶이 꿈인지도



장자의 제물론에는 유명한 ‘호접몽’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언젠가 꿈에서 내가 나비가 되어서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고, 내가 사람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잠에서 깨어보니 틀림없는 ‘나’라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대체 사람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에 사람인 나로 변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꿈을 꾸는 동안에 그 꿈이 너무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나서 생각해보면 너무 비현실적이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것을 단번에 알아차립니다. 꿈을 꾸는 동안 어째서 이것이 말도 안 되는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 삶도 그렇게 긴 꿈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이 모습이 ‘실재(實在)’가 아니라고는 도무지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마치 꿈을 꿀 때 그것이 ‘실재’로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 삶도 그런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지우고 싶지만,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아픈 기억도 사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꿈이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그런 상상은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긴 꿈에서 깨면,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 사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음에 기뻐할 것이고, 사무치게 그립지만 볼 수 없는 사람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면 말할 수 없이 허전해하면서도 한편으로 안도의 미소를 지을 것도 같습니다.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한 사람이 살아가는 일생은 몇 초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어쩌면 긴 꿈이라는 생각마저도 그저 우리의 생각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 넷. 연기



피어나는 연기를 본 적이 있는가

서서히 흘러 희미해진 잔상을 본 적이 있는가

가슴 속에 갇힌 듯한 시름이 지금 그대에게 있는가




생각 다섯. 기적과 기정사실



기적 같은 희망, 기정사실 같은 체념, 그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품으면 마치 약을 복용한 것처럼 반짝 힘이 나지만, 그 희망마저 덧없이 떠나가는 것을 생각하면 약효가 사라져 더 힘든 몸처럼 되어버립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체념하면, 왠지 마음은 조금 편하지만, 아무런 희망도 품지 않는다는 것이 마치 공허한 세상에 덩그렇게 놓인 기분이 들게 합니다. 그리하여 어느 한쪽에 가만히 있으면 힘들어지는 마음은 마치 뜨겁고 차가운 돌을 번갈아 밟으며 각각의 고통을 모면하는 것처럼, 기적 같은 희망과 기정사실 같은 체념의 이쪽저쪽을 오고 갑니다.




생각 여섯. 위로



줄기의 밑동이 잘려나가지 않는다면 나무는 감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러지는 가지도, 떨어지는 잎사귀도. 시련 없는 삶이 어디 있냐고 다들 시련을 겪으며 살아간다고 말하지만 아픔을 위로한다며 펜을 든 시인조차 펜을 꺾고 마는 그런 아픔도 보았습니다.


그에게 감내할 수 없는 아픔을 묵인하신 이여

제가 대신할 수 없는 위로도 함께 내려주소서




생각 일곱. 빛



희망은, 희망 속에서도 자랄 수 있고, 절망 속에서도 피어날 수 있습니다.

희망 속에서의 희망은 마치 화창한 아침에 내리는 또 하나의 빛처럼

밝음 속에 희미합니다.

절망 속에서의 희망은 마치 칠흑을 가르는 한줄기 섬광처럼

어둠 속에 선명합니다.




생각 여덟. 가지가 떨어질 때



바람이 세차게 흔들고 지나간 자리에도 가는 잎사귀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내리다 지쳐 성겨진 눈발이 이슬로 흐를 때까지 쌓인 눈 털어내지 않습니다. 차가운 어제를 견디고 나서 더 영롱한 빛으로 결을 뻗는 솔잎들…

화창한 햇살을 저어대는 산새의 날갯짓에 만물이 하나둘 소생하고 유채색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 오면 그제야 오래전 썩어버린 가지 하나 땅에 떨굽니다.


그는 오래전에 마음을 다쳤습니다. 그러나 차마 그 마음을 편히 쉬게 해주지를 못했습니다. 그도 힘들지만,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 더 힘들고 쓸쓸해 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둘의 희망을 되찾아야만 했습니다. 추운 계절 뒤에 찾아오는 따뜻한 봄볕처럼, 그에게도, 그가 미안해하던 사람에게도 희망이 돌아와 주었습니다. 기뻐해야 할 마음이 기쁨을 잠시 문밖에 기다리게 하고서, 그간 고단했던 마음이 그제야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괜찮아 지금의 서리도

햇볕 아래 곧

이슬이 될테니




생각 아홉. 범사



디폴트값이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이는 컴퓨터 프로그램 등에서 사용자의 선택이나 개입이 없을 때를 대비해 자동으로 미리 설정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기본설정값이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삶의 디폴트값은 순탄함이 아니라 내 뜻을 거스르는 상황에 더 가깝습니다. 성경에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범사는 말 그대로 평범한 일상이라는 의미이겠으나, 범사의 의미를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 소위 삶의 디폴트값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견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 속에서도 유익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설령 아무런 유익함을 찾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황을 극복하는 것 자체가, 아니 극복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을 맞닥뜨리고서도 이내 흔들림을 다잡고 나아가는 모습 자체가 무언가 얻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범사에도 감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생각 열. 좋지 않은 사태 이후 생의 침묵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허공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그 모습에 화들짝 놀라서 짐짓 다시 결연한 눈빛을 장착해봅니다. 가끔씩 이것을 되풀이한다. 어떤 시기의 휴식은 그랬습니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것은 사실 좋은 현상일 수 있습니다. 일 중에는 좋은 일도 있겠지만 나쁜 일이 더 많이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처럼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현상을 ‘공허함’이라는 또 다른 ‘힘듬’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특히, 어떤 안 좋은 일이 있고 난 후에 아무 일이 없는 것은 보통 때 아무 일이 없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것은 단순한 공허함이 아닙니다. 일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거나 주변을 정리하는 등 의식적으로 의미 있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왠지 내 정신이 도태되고, 자칫하면 잘 빠져나오기 힘든 수렁으로 잠길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마치 예전의 그 안 좋은 일을 내게 안겨주었던 어떤 악한 시험자가 내가 버티는지 보기 위해 사태가 개선되지 않게 방해하고 그 공허함을 나에게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에 이르자 내 안에서는 다시 반발심이 생깁니다. “그래 네가 나를 시험하지만, 내가 이 공허를, 좋지 않은 상태가 개선되지 않고 지속되는 것을 어떤 변고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것을 잘 지켜보아라” 하는 생각입니다. 사실은 어느 순간 속절없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채 떨쳐내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런 의지를 다져보는 것입니다.

이윽고,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버티다가 무너져도 받아들이겠다는 수용의 상태로 바꾸어버리면, -모든 것을 감수하면, 감수했던 그 두려움은 현실이 되지 않는다는 잠재적 소망은 유지한 채로- 그제야 저는 예전의 멀쩡한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어떤 공허함도 못 느끼는 사람처럼 활력 있게, 또는 활력을 가장한 채로 제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keyword
이전 03화아직은 무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