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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J Oct 27. 2024

반복, 이탈, 제자리, 그리고 변화

생각 하나반복 공회전이 아닌 운행이 되도록          



 농담조로 흔히 '인생 뭐 있어'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에도 되풀이되는 일상의 단조로움이 배어 있을 것입니다. 반복에는 목표가 있는 반복이 있고, 그렇지 않은 반복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험생이 시험을 대비하여 끊임없이 복습하거나 작가가 오랜 시간 동안 책상 앞에 앉아서 쓴 글을 퇴고하거나 직장인이 직장에서 어떤 과제를 성사하기 위해 업무를 반복하는 경우가 전자의 예입니다. 

     

 반복은 같은 행위를 되풀이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목표가 있는 반복은 그렇지 않습니다. 설령 똑같은 내용의 복습을 하거나 퇴고를 하거나 업무를 하더라도 어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 무언가를 새롭게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의 되풀이가 아닙니다. 복습을 통해 지식에 대한 인지가 강화되거나, 글의 의미가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담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거나, 같은 업무를 하면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업무의 질이 개선되고 자신의 역량이 향상된다면 이것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 뭐 있어'라는 말이 무색하게 매일매일 화려하고 다채로운 삶을 살아갈 기회를 가진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의 삶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자칫 허무에 빠질 수도 있을 만큼 우리의 삶은 되풀이의 함정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반복이 공회전이 아닌 운행이 될 수 있도록 그 반복 속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신우일신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날마다 무슨 새로운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반복되는 삶에서도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었을 때 그 다가오는 의미가 다릅니다. 우리 삶도 그럴 것입니다. 비록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이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도 무한한 변화와 발전이 있습니다. 반복하여 교정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수년 전에 처음 쓴 글의 초안을 바라보면 쑥스러울 정도로 어색한 경우도 있습니다. 헤밍웨이는 그의 유명한 소설 ‘노인과 바다’를 200여번이나 고쳐 썼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사실 반복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고 그 긴 여정이 하나의 창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반복 속에서의 무한한 변화와 발전은 당연히 이를 추구하고 원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지 않는 사람에게는 반복은 그저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되풀이일 뿐입니다.        



       

생각 둘이탈 성찰의 기회를 가진 사람          



 걱정이 없는 상태에서는 보통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흐름에서 이탈했을 때, 비로소 거기서 성찰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한 이탈의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깊은 성찰을 해온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삶이 정상적인 흐름을 유지하는, 즉 안정적이라면 그것도 좋은 일이나, 정상적인 흐름에서 이탈하는 경험을 많이 했다고 해서 자신을 불운한 사람이라고 안 좋게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나 자신은 성찰의 기회를 많이 가진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생각 셋제자리   


        

 그 안에 어떤 고단한 세계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바람이 훑고 지나가도, 낙엽이 뒹굴어도, 먼 희망 같은 햇빛 한 줌 쉬어 가도 도통 속내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세월이 부딪치고 지나간 듯, 곳곳에 파인 자국 위로 검버섯이 돋아 있습니다. 가끔 사람이 뿌려댄 오물의 흔적도 털어내지 못한 채 장식처럼 품고 지냅니다. 언제나 제 비밀을 내어놓을지, 언제나 저를 스쳐 간 삼라만상의 비밀을 풀어놓을지, 적적한 산의 저녁을 함께 맞아줄 이도 없건만 오늘도 그는 제자리를 떠나지 못합니다. 몸소 낙엽 진 마당을 쓰는 노승의 굽은 허리 위에서, 낡은 바위는 그렇게 오늘도 또 한 저녁을 기다립니다.    

      

 구름 없는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때때로 흐린 날씨에 가려지기도 하지만, 태곳적 누군가가 바라본 하늘처럼, 까마득한 훗날의 누군가가 우러를 하늘처럼, 날이 개니 여전한 빛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인간의 텃밭이 사라진다 해도 그 빛깔은 저대로일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운명인가 봅니다. 멸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인가 언제 다시 생겼는지 구름 한 점이 다가옵니다.



                    

생각 넷변화     



 2월이 다 가고 3월이 되었습니다. 3월이지만 아직도 겨울의 잔재가 가득 남아있습니다. 눈은 다 녹지 않았고 수북이 쌓여있습니다. 거리의 사람들은 아직도 겨울에 입던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습니다. 아직은 봄이 오지 않은 것입니다.
  
 주말에 둘레길 산책에 나섰습니다. 채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외투를 벗어야 했습니다. 갑자기 5월의 날씨가 된 듯했습니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아니었으면 영락없이 5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선선한 정도가 아니라, 벌써 온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차가운 바람에 외투의 깃을 바짝 세우고 길을 걸었는데…. 변화의 진통은 아주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진행되겠지만, 정작 변화는 순식간에 우리에게 다가오곤 합니다.      

겨울이 채 떠나지 않은 3월 초에 부는 때아닌 5월의 훈풍을 바라보며, 묵혀있던 나의 진통들이 갑자기 다가온 봄처럼 마술 같은 변화를 안겨다 주는 희망이 피어나는 그런 산책길을 걸어보았습니다.

     

 삶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 변화는 순간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한 변화가 결코 우연한 순간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그 짧은 순간이 있기까지 아마도 오랜 세월 동안의 준비가 응축되었을 것입니다. 마치 꽃이 피는 것은 한순간일지라도 꽃이 피기까지 오랜 세월의 준비가 있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변화의 순간은 그저 우리에게 인식되는 외부적 모습일 뿐이고, 그 내면의 치열하고 오랜 준비 기간은 다만 보이질 않았을 뿐입니다. 변화의 요인이 축적되다가 추가적인 작은 요인에 의해 갑자기 큰 변화가 초래되는 현상을 의미하는 급변점이라는 개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변화의 순간은 결코 갑작스럽게 도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극적인 변화를 바란다면 우연히 어떤 순간이 내게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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