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준생 사이에 내려오는 승무원의 관상 이야기.
영화 <관상>에 유명한 장면이 있다. 이정재(훗날 수양대군)가 조선 최고의 관상쟁이(송강호에)에게 묻는다.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승무원의 '관상은' 승준생(승무원 준비생)들 사이에서 꽤나 핫한 주제이다. 승무원 스터디를 가면 소위 그 스터디의 터줏대감이 새로 들어온 멤버의 얼굴을 유심히 보며 말한다. “아~ 누구 씨는 중동 항공사 상이네.” 그러면 그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의 주석을 덧 붙인다. 대칭이 맞는 게 싱가포르상이다,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게 중동 항공사 상이 다하며 새로운 승준생의 미래의 항공사를 점찍어준다.
나 역시도 이런 관상쟁이(?)들에게 내 관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조이유 씨는 홍콩 상이야.” “중동상은 아닌 것 같아.” “아시아 상에 가까운 것 같아” “대한항공보다는 아시아나 상이야.”
처음 들어본 항공사들 이름과, 이 바닥의 까막눈이었던 나는 마냥 그런가 보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아시아 항공사로 가게 될 거라 노트에 적었다.
야매 관상쟁이들도 마냥 무턱대고 그냥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선조의 지혜가 구전으로 내려오듯, 승무원 선배님들의 구구절절 내려오는 이야기들과 더불어. 주변 합격생들을 분석한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나름의 기준이 있다. 예를 들어 얼굴이 동그랗고 참한 상이면 홍콩상. 작고 마른 몸에 도자기 피부라면 싱가포르상.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화려하면 중동상 등등.
회사마다 인재상이 있기 때문에 아예 틀린 정보라고는 할 수 없다. 보통 아시아 항공사들은 마르고 동그란 인상을 좋아한다면 중동 항공사들은 키가 있고 건강한 체형을 선호한다. 나는 그들의 말에 따르면 아시아 항공사 상이 었다. 그중에서도 홍콩 항공사들이 선호하는 이미지라고 했다. 놀랍게도 실제 나는 홍콩 모 항공사에 합격했다. 또한 관상적으로(?) 반면에 중동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했는데, 진짜로 중동 항공사의 합격률이 높지 않았다. 최종은 불사하고 초반에 떨어지기 일 수였다.
그럴 때마다 관상쟁이들의 말이 나의 불합격을 정당화시켜주었다. 내가 떨어진 거는 내가 아시아 상이라서 떨어진 거구나. 그래서 상처받을 거 없이 그냥 안 맞는 항공사구나 하고 털고 나오고는 했다. 당연히 진짜 그러한 이유로 합불이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숱하게 면접에서 떨어질 때라, 무엇보다 나의 자존감을 지키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그게 관상쟁이들의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사이언스라고 할지언정 나를 빠르게 다시 일으켜주기만 한다면 괜찮다며 위안을 삼았다.
모든 영화에 극을 뒤흔드는 반전이 늘 등장하듯, 나는 나의 관상을 이겨내고 중동 항공사의 승무원이 되었다. 나도 마지막 합격 이메일을 받을 때 까지도 내가 합격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집에서도 홍콩을 간다던 딸이 갑자기 중동을 간다고 하니 축하하면서도 어리둥절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중동 비행기에 오른 홍콩 상의 승무원은 어느새 비즈니스 클래스 승무원이 되었다.
인상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단순히 생김새를 넘어서, 그 사람의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가 얼굴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승무원이 되고 나서 보니 나는 승무원이 될 관상보다는 '인상'이었던 것 같다. 면접관의 휘몰아치는 질문에서도 덜덜 떨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정신없이 대화가 오고 가는 디스커션 중에도 옆에 사람을 나도 모르게 챙기고 있었다.
비행은 매일 바뀌는 밤낮에 예민해지고, 수많은 일을 동시다발 적으로 하다 보니 날이 서는 순간들이 많이 찾아온다. 이런 상황에서도 비행기 안전을 체크하고, 승객들과 웃으면서 이야기를 능숙하게 하는 관상은 없다. 본인의 한계에 밀어붙이는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묵묵히 해낼 수 있는 그러한 인상을 찾는 것일 뿐. 그리고 그 사람의 길 끝에 우리가 바라보는 각 항공사만의 관상이 서 있는 게 아닐까.
거울에 비친 홍콩 항공사의 관상이었던 얼굴을 들여다본다. 입사 초반에 어색했던 갈색 베레모가 어느새 익숙하게 모양이 잡혀 머리에 자리하고 있다. 손에 익은 캐리어를 끌고 자연스럽게 힐에 발을 넣고 문 앞을 나선다.
중동 항공사의 상, 지금 나의 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