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내식 쟁탈전과 피하지 못하는 머피의 법칙
비행기에서 카트를 끌고 나오면 사람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밥을 몇 번 줄까. 몇 개의 선택지가 있을까. 나한테 그 선택지가 다 올까. 등등의 기대 반, 설렘 반의 표정들이 보인다. 역시 비행의 꽃은 기내식이 아니겠는가.
승객분들이 종종 가장 인기 많은 기내식이 뭐냐고 물어보시는 경우가 있다.
기내식은 노선마다 실리는 게 약간씩 다르고, 나의 베이스에서 출발하는지, 바깥에서 기내식이 들어오는지에 따라 다 다르다. 기내식을 나눠주다 보면 미리 회의를 한 것도 아닌데 각각의 나라, 인종들마다 원하는 게 확연이 다 달라서 신기하다.
예를 들어, 유럽인은 무엇을 먹던 와인부터 찾고, 동남아 사람들은 콜라와 사과주스를 많이 마신다. 인도인들은 망고주스와 설탕을 잔뜩 넣은 티를 원한다. 한국인들은 외국인 승무원들도 입을 모아 항상 말할 정도로 맥주를 물보다 많이 마신다. 그와 더불어 많이 마시는 레드 와인까지.
이코노미 승무원 시절, 앞 세줄이 끝나기 전에 와인 5병과 맥주 한 짝을 끝낸 적이 있다. 회사도 이를 인지하고 있어서 한국 노선에만 특별하게 '맥주&와인' 카트라는 따로 실릴 정도이다.
음식은 대부분 평균적으로 치킨을 많이 먹는데, 유럽권 사람들은 파스타를 좀 더 먹는 경향이 있고, 아랍인들은 양고기 볶음밥을 선호한다. 동남아 사람들은 생선을 많이 먹고 인도인들은 채식을 많이 먹는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치킨을 많이 먹는데 불고기나, 닭갈비 등이 있으면 한식 메뉴를 선택하는 편이다.
자, 이제 진짜 리얼리티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가장 인기가 많은 기내식은 무엇인가. 바로 내 카트에 '없는' 기내식이다. 웃프지만, 머피의 법칙을 하늘이라고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 이 모든 게 영화 <트루먼쇼> 마냥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승객은 가장 빨리 떨어지고 있는 그 기내식을 원한다.
매번 치킨이 제일 먼저 동나는 노선 때, 갤리(키친) 담당에게 내 카트에 치킨을 많이 넣어달라고 윙크를 수없이 한 끝에 잔뜩 받아 넣었다. 대장군 마냥 위풍당당하게 캐빈(기내)으로 나갔지만, 현실은 다들 파스타만 먹고 싶다고 해서 속수무책이 되었다.
내가 아무리 그간의 비행으로 빅데이터를 구축해봐도, 매번 바뀌는 승객들의 초이스를 완벽히 준비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렇게 초이스가 부족한 상황이 오면 승객에게 승무원으로서 진심으로 미안하다. 기내식 종류가 부족한 것은 승무원 탓은 아니지만, 설레어 했을 승객을 알기 때문에 당연히 마음이 불편하다.
나 같은 경우는 밥이 두 번 나가는 노선의 경우, 다음 식사에는 반드시 먼저 찾아가 메뉴를 고를 수 있도록 해준다. 적어도 한 번은 내가 꼭 승객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보통 이렇게 하면 대부분의 마음씨가 넓은 승객들은 상황을 이해하고 두 번째 먼저와 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모든 비행이 이렇게 술술 풀려나가는 것은 아니다. 속상한 승객을 위래 발바닥이 불이 나게 다른 카트를 찾아다녀도 치킨이 갑자기 땅에서 솟아나지는 않는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다른 대안을 제시를 해봐도 자신은 치킨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하는 승객을 만족 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해줄 수만 있다면 내 옆구리를 떼어서라도 치킨을 만들어주고 싶다. 그게 안되면 하늘의 구름이라도 빚어서 만들어주고 싶지만 해리포터가 되지 못해 사과밖에 할 수 없다. 인생을 오로지 치킨만을 먹어왔는데 자신에게 파스타를 먹으라는 것은 치욕이라며 사무장을 불러달라길래 불러줬다. 하지만 사무장이 온다고 해서 뭐가 크게 달라 질 리가 없다. 그래도 안되자 기장을 불러오라며 떼를 쓰는 승객을 보며 애꿎은 치킨 탓하며 멸종하면 좋겠다는 나쁜 생각도 들었다.
비즈니스로 승진한다고 해서 머피의 법칙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즈니스 승무원으로서 인천 노선을 뛰게 되면서 메뉴판에서 오려내고 싶은 메뉴가 있다. 바로 인천 노선에만 실리는 '소고기 비빔밥'이다.
승객으로 탈 때는 참 맛있던 메뉴인데 승무원이 되니 이 비빔밥은 원수가 아닌 원수가 되었다. 자랑스러운 K- 푸드인 것은 알지만,회사에서 심각하게 이메일을 써서 이 메뉴를 없애달라고 하고 싶다. 이코노미 시절에도 인천 노선에서는 비즈니스에 통역하러 많이 불려 갔었는데, 그 태반의 이유도 이 대단한 비빔밥 때문이었다.
비빔밥의 개수는 한정이 되어있는데 한국 승객들은 물론이거니와, K-드라마를 본 외국인들도 이게 그 비빔밥이냐며 너도나도 주문한다. 그리고 내 앞에 주어진 비빔밥은 손가락 다섯 개 남짓.
아직 잘못한 것도 없는데 캐빈에 나가기 전에 미안하다는 말을 한번 내뱉어 본다. 갑옷 없는 장수는 전쟁터에 화살받이가 될 마음으로 나선다.
물론 없어도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주시는 감사한 분들도 계시지만 "내가 원래 대한항공만 타는 데 말이야."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당뇨가 있어서 비빔밥을 못 먹으면 약을 못 먹는다고" 등등의 익숙한 레퍼토리도 존재한다.
그러면 전체 메뉴를 다 비빔밥으로 실어버리면 되지 않냐고 물을 수 있지만, 가는 날이 왜 장날이겠는가. 그날은 모두 다 비프스테이크를 찾는 날이다. 한국인으로서 이 금으로 도 못 살 비빔밥에 솔직한 평을 하자면 김밥천국에서 먹는 돌솥 비빔밥의 반도 못 될 맛이다. 그러니 부디 너무 아쉬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최근에 비즈니스에 승객으로 탔는데 크루가 자는 나를 깨웠다. 거의 울기 직전의 얼굴로 너무 미안한데 지금 비빔밥이 없어서 앞에 난리가 났다며 승무원인 네가 양보해주면 안 되겠냐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나를 깨웠을까.
당연히 괜찮다고 대충 다른 거 아무거나 먹고 편히 비행을 끝냈다. 어차피 한국에 내리면 천지에 더 맛있는 게 가득한데 뭐를 먹으면 어떻겠는가. 여담이지만 승무원이 아닌 어떤 분께 이 해프닝을 말했는데, "그럼 앞으로 원하는 기내식 없으면 승객으로 탄 승무원한테 바꿔오라고 말하면 되는 거야?"라고 묻길래 쓰게 웃었다.
비록 일면식 없는 우리지만, 같은 승무원으로서 미리 사과를 드린다. 치킨이 없어서 죄송하고, 비빔밥을 더 많이 준비하지 못해 진심으로 송구하다. 몇 년 만에 오르는 비행길에 원하는 기내식을 받지 못하는 게 얼마나 속상한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더 준비하지 못해서 이렇게 미리 사과를 드린다. 그러니 너무 노여워 마시고 승무원들은 조금은 어여삐 봐주시면 안 될까 감히 부탁드려본다.
오늘도 잠자리에 들며 손 끝에서 치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해리포터가 되게 해 달라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