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항사에서 일하는 한국인 승무원에게 한국인 승객이란
외항사에서 일하는 한국인 승무원에게 인천 레이오버는 참으로 소중하다. 가서 만나야 할 사람들, 사 와야 할 것들과 소중한 핫 후라이드 치킨까지. 홍길동을 십이진법으로 나눠서 돌 아녀도 부족한 판국이다. 하지만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하 듯 영종도에 내리기 위해서는 거친 인천 비행을 감내해야 한다. 외국인 크루들한테는 조용하고 스무스한 비행이지만 '한국인' 승무원에게 인천 비행은 그들과는 다른 비행이다.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하는데 인천 비행을 오가는 외항사에 한국인 승무원이 반드시 타야 하는 조항 같은 것은 없다. 다만 항공사에서 메디컬을 대비해서 한 명의 랭귀지 스피커를 둘 뿐이다. 인천 비행기에 탑승하는 350명의 승객 그리고 하나의 한국인 승무원. 출발 전에 홍삼을 들이키며 비장한 마음을 다스려본다.
비행이 시작되고 땀이 쏟아져라 뛰어다니면서 홍반장을 하는데 외국인 크루가 뽀송한 얼굴로 "저 승객이 한국인 승무원 불러달래"라는 말에 들이키려던 물 잔을 내려놓고 갔다. 보통 이렇게 가면 대뜸 화부터 내시는 경우가 많다. "내가 아까부터 와인을 갖다 달라고 말을 했는데 왜 안 줘!"라고 하시는 승객분꼐 우리는 지금 처음 만난 거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나한테 텔레파시로 주문하신 것 같은데 비행기에서는 잘 안 터진다고 말씀려야 했나.
김치가 없다고 소리 지르는 승객분을 위해 갤리에서 미니 텃밭을 만들어 고랭지 배추를 기르고 싶다. 고랭지란 '표고 600m 이상으로 높고 한랭한 지역'이라던데, 우리는 36,000ft까지 올라가고, 기내도 한랭 그 자체니 맛 좋은 배추를 보장할 수 있을 것 같다. '비행기 특송, 신선한 고랭지 김치' 상표도 이미 준비했다.
승무원이 여럿이지 않냐고 물으신다면 크루가 많아도 한국인 승객분들 중에는 한국인 승무원을 찾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외국인 크루들도 은근슬쩍 우리에게 일을 미루기도 한다. "저 한국인 승객 영어 못해서 네가 해야 될 것 같아."하고 본인은 밥을 뜨는 크루가 조금은 얄밉기도 하다. 그래서 이를 아는 사무장들은 브리핑 때부터, 한국인 크루들한테 미루지 말고 손짓 발짓해서 어떻게든 네가 알아서 해결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외 비즈니스 크루들이 불러서 가서 날벼락을 맞는 경우도 허다하고, 쓰러지는 승객들 산소마스크도 씌워드리고 입국 서류 쓰는 거 도와달라는 어른들을 모르는 척하지 못해 도와드리다가 결국 랜딩 때까지 굶을 때가 태반이다. 하지만 나를 애타게 찾는 승객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이해한다. 낯선 외국인들만 있는 이 비행기에 같은 한국인이 보이니 그간 답답했던 말들을 얼마나 하고 싶으실까.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아 비행 내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다니다가 크루 버스에서 여름을 맞이한 올라프처럼 녹아내린다.
하지만 이렇게 늘 파김치가 되어도 나는 한국인 승객들을 사랑한다. 비록 인천 - 아부다비 노선에서는 너무 많아서 한 분 한 분 챙겨드리기 어렵지만, 특히 아부다비 - 다른 외국 노선에서 마주하는 한국분들은 일부러 찾아가서라도 잘해드리려고 노력한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한국인 승객들을 애정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인천 비행 만의 특징이 있는데 카트를 끌고 기내를 나가서 메뉴를 손님들에게 한분 한분 설명을 하며 기내식을 나눠드린다. 보통 한 서비스에 팔십 분 정도께 말씀을 드리는데 음식 한번, 음료 한번 이렇게 말하다 보면 평균 백오십 번 이상은 질문은 한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못 알아 드리시거나 이해를 못 하시면 설명을 하고, 음료에 얼음을 넣을 건지, 어떻게 칵테일을 만들 건지 등등 질문을 계속하다 보면 오백 번의 질문도 허다하다. 하지만 한국 비행은 다르다.
첫 줄 분들께 메뉴를 설명하기 시작하면 세 개의 의자 틈 사이사이로 둘째 줄 분들의 얼굴이 보인다. 귀를 쫑긋하고 들으시는 모습이 토끼 같아 너무 귀엽다. 그렇게 뒷분들이 열심히 듣고 웅성웅성 말씀하시면 그 뒷 줄 분들도 소문을 듣고 마구 기내로 퍼져나간다.
첫 줄 서비스가 끝나고 둘째 줄에 도착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저희..." 하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치킨 둘, 생선 하나, 오렌지 세잔이요." 하면서 손가락으로 숫자까지 일목요연하게 말씀하시는 승객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아무리 정신없는 서비스라도 멈추고 꼭 말씀드린다. "배려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혹시나 해서 쓰건데이렇게 해야 할 이유도 없고, 그런 것이 승무원에 대한 매너인 것도 아니다. 얼마든지 메뉴 설명을 듣고 정하셔도 된다. 그저 이렇게 먼저 배려해주시는 그 마음에 진심으로 감사할 뿐이다.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알게 모르게 한국인 승무원을 아껴주신다. 나보다 무거운 카트를 낑낑대며 끌면 뒤에서 손으로 조금씩 모르는 척 밀어주신다. 인천공항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 마시는 게 비행 전 낙인데 줄이 길어서 발을 동동 구를 때면 먼저 가라며 양보해주시기도 한다. 뒤에서 너덜너덜해지게 일하는데 지나치시다가도 "아까부터 내가 아가씨 앉는 거를 본 적이 없어, 밥은 먹고 일해요?"라고 묻는 승객들도, 내가 밥을 먹고 있으면 오셨다가 조용히 다시 돌아가시는 승객들까지, 대감집 막내 고명딸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사랑받으며 비행하고 있다.
얼마 전 바르셀로나 비행을 하는데 한국인 승객분들이 계셔서 한 개라도 더 챙겨드리고 싶어 기내식도 더 드리고 몇 번 찾아뵈었었다. 더 챙겨드리고 싶었지만 원체 바쁜 비행이라 스치면서 테이블에 올려두고 가는 게 전부일뿐이라 딱히 잘해드린 것 도 없었다. 그렇게 랜딩을 준비하며 복도를 빠르게 지나는 데 한 여성분이 "저기요"하면서 내 앞치마를 부여잡았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약과 몇 개를 누가 볼세라 내 주머니에 넣어주시며 말했다. "가지고 있는 게 이거밖에 없어요. 너무 고마워서." 아까 대감 집 막내 고명딸은 아닌 것 같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고명딸이 맞는 것 같다. 랜딩 해서 호텔에 들어가서 약과를 입에 무는데 배시시 웃음이 났다. 비밀인데, 나는 약과를 엄청 좋아한다.
인천 비행 중에 잠깐 쉬는데 한 젊은 승객분이 한참을 머뭇대다 물으셨다. "혹시, 너무나도 죄송한데, 제가 너무 속이 답답해서 그러는데, 그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어렵겠죠.....?" 외국인 크루면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했겠지만 얼죽아 회원으로서 그 마음 필히 이해해 몰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타드렸다. 연신 고맙다며 아메리카노를 들이켜시던 손님을 보며 약과 값을 여기서 갚을 수 있는 거면 좋겠다 웃었다.
한 번은 비행 때 바쁘다 못해 온갖 이슈가 다 터져서 숨만 바드시 쉬면서 인천에 내린 적이 있다. 마중 나온 한국인 지상직 분들이랑 이야기하는데 왜 이렇게 손을 떠냐는 말에 지나가는 말로 비행 내내 아무것도 못 먹어서 그렇다며 웃었다. 그러자 급하게 동료분에게 간식을 가져오라며 손에 젤리를 꼭 쥐어주셨다. 감사하다는 말에 고개를 저으시며 "얼마나 힘들었으면 가면서 얼른 먹어요"하며 위로해주시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인천 지상직 분들께 오늘도 이렇게 빚을 지고 간다.
지난달 한국 비행 때 유럽여행을 한 달 동안 간다던 대학생 승객분들을 맡은 적이 있다. 대구에서 올라오신 일곱 분이셨는데 어찌나 비행 때 매너 있게 대해 주시고 공손하신지 덕분에 쉬이 비행했다. 고마운 마음에 이것저것 더 챙겨드리며 비행을 마무리하는데 문이 늦게 열리면서 잠깐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나 볼듯한 생생한 사투리로 "승↗무원분은↘ 영어 어디서 배↗우셨어요?" "와 이제 그라문 어디로 가시는데요?" 하며 이것저것 묻는 게 내 동생 같아 귀여웠다. 이제 곧 돌아가실 때가 된 것 같은데 잘 가셨으려나.
아무래도 역시 나는 한국인 승객분들이 좋다. 지치고 포기하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있어도, 응원해주시고 아껴주시는 소중한 승객들 덕분에 오늘도 행복한 기억들만 트롤리에 담아 내린다.
곧 인천 비행이 기다리고 있다. 하늘 위에서 재배한 고랭지 배추로 김장은 하지 못했지만 녹아버린 올라프가 될지 언정 비행기에 모든 것을 내어드리리라.
"승객 여러분의 탑승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