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민 [가짜와 진짜]
배가 너무 고프다. 목도 마르다. 수영은 내 침대 옆에 꼭 붙어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수돗물이라도 먹으라고? 있었으면 마셨지. 수도꼭지를 열면 액체가 아닌 가스가 나온다. 이온가스라나 뭐라나.
큼지막하게 –사망 위험- 이 붙어 있어 입에 댈 용기도 없다. 변기는 백 년 전 비행기처럼 물이 없다.
영화에서 보면 물 말고 이온음료라든지 콜라라든지 무언가로 바뀌었던 것 같은데 현실엔 마실 수 있는 액체를 찾아보려 해도 없다. 사실대로 말할까, 난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다고. 저 사람이 수영이 확실하다면 말했겠지만. 저 여자가 수영인지도 아직 확실치 않다.
관자놀이를 아무리 꾹꾹 눌러봐도 뭔가 활성화되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난 분명 데이터의 관리를 받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도 유일한. 꾸벅꾸벅 조는 수영의 옆으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내리고 거의 짐승처럼 네 발을 사용해 앞으로 천천히 기어가 다리 끝이 바퀴로 이루어진 간호사를 찾아 묻는다. 데코레이션 물은 어디 가야 있나요? 간호사가 우뚝 멈추어 서더니 3층으로 가라고 한다. 무의식적으로 감사합니다. 말하자 간호사는 또 우뚝 선다.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언어는 사용하지 말아 주십시오. 경고입니다.’다시 스르륵 앞으로 나아간다. 로봇에게도 감정이 있다고 할 수 있나. 난간을 겨우 붙잡으며 엘리베이터를 타 3층을 누른다. 장관이 펼쳐진다.
온갖 나무를 심어놓은 듯 넓은 옥상정원, -만지지 마시오.- 팻말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식물원에 온 듯 노란색, 파란색, 분홍색, 호랑나비까지 날아다닌다.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사람들은 벤치에 앉아 잔잔한 미소를 띠곤 여유로워 보인다. 분명 행복은 데이터를 많이 잡아먹는댔는데,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람들은 정원 이곳저곳을 누빈다.
은행나무 (243년) 옆으로 모서리를 따라 패인 홈에 물이 흐른다. 당장이라도 입을 가져다 대고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지만, 보는 눈이 많다. 아니, 신경 쓰기엔 당장 죽을 것 같다. 미끄러지는 물에 입을 쭉 빼고 빨아먹는다. 비릿한 수돗물의 향이 난다. 십 초 뒤 홀가분하게 몸을 들어 턱에서부터 떨어지는 물을 닦는다. 모든 사람이 역겹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슬쩍 웃어 보이자 모든 사람이 그 모습 그대로 멈춘다.
아마 나의 기억을 삭제한 것 같다.
억지로 걸어보려고 해도 다리에 근육이 다 빠져 휘청 휘청 거린다. 벽을 아무리 짚어도 넘어진다. 배가 너무 고파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몇 번의 헛구역질을 한다. 사람들이 이젠 나를 보지 않겠다는 듯 등을 돌린다. 소중한 메모리를 이딴 걸로 채우지 않겠다는 거지. 도저히 안 되겠어 남은 벤치 하나에 풀썩 앉는다. 환자복을 입은 남자가 내 옆에 앉으며 목례한다. 나도 꾸벅, 멍하니 눈앞 소나무 한 그루를 쳐다본다.
“여긴 왜 오셨어요?” 쌍꺼풀이 진한 큰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묻는다. 왜 왔냐고? 내게 이유가 있나?
“아파서 왔죠” 쌀쌀맞게 대답한다. 그가 큰 눈을 계속 꿈뻑대며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들킨 건가? 정말 아무것도 안 했는데.
“로봇인가?” 그가 팔을 뻗어 내 정수리부터 관자놀이를 쓸더니 관자놀이를 쿡 누른다.
“깜짝이야, 뭐 하시는 거예요”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뺀다.
“사람이세요? 만져지는 게 없길래 로봇인 줄 알았어요” 요즘 사람은 무언가 만져지는구나.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관자놀이 쪽 혈관에 톡 튀어나온 선이 비친다.
“아.... 제가 살이 쪄서 그런가 봐요” 근육도 다 빠져 마치 해골 같으면서, 그런 핑곌 대다니.
“그렇구나, 아 저는 박선우입니다. 그쪽은?”
“한지민입니다.” 3층에 확성기가 울린다
‘햇살 모드의 산책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다음 산책은 비바람 모드입니다.’
이 좋은 풍경도 가짜였구나, 최대한 이상하지 않게 보이려 다리에 있는 힘을 다 주지만 다섯 걸음 중 한 번은 주저앉는다. 우르르 나가는 사람 중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창피하지만 한쪽 팔을 바닥에 집고 엉금엉금 긴다. 내 팔이 끌려 올라가는 느낌이 든다.
“몇 호실이세요, 같이 가시죠.” 박선우가 내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고 뚜벅뚜벅 걷는다. 105호 내 병실로 들어가 조심히 나를 앉힌다. 수영이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감사합니다” 이 한마디에 수영이 달려와 내 입을 막는다. 왜 이래! 놔! 쉿 쉿,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을 툭툭 친다.
남자의 표정이 구겨져 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이 세계에선 금기어인 거야? 로봇 간호사도 그렇고.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네요. 그 말” 박선우가 문을 닫고 나간다.
“미쳤나 봐 미쳤어, 내가 이 중요한 얘기를 빼먹었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또 뭐가있더라.... 암튼 예의상 우리가 했던 말들 있잖아? 뭐랄까.... 그래 그런 말도 데이터 테러라고 할 수 있어. 그 말엔 장소 상황 사람 감정이 다 들어있잖아? 용량 진짜 커. 그 말을 들으면 무조건 하나의 기억은 지워야 할 정도로, 그니까 그런 말 이제 쓰지 마. 이상한 사람 걸리면 너 죽을 수도 있어, 장난 아니고 진짜로. 근데 저 남자 누구야?”
감사합니다가 날 죽인다니, 참 웃기는 세상이네.
“삼 층에서 만났어.” 삼 층? 삼 층을 왜 가? 그냥. 수영은 말이 많아도 너무 많다. 퇴원하면 난 어디로 가야 하지? 내가 살던 집은 그대로 있나. 없겠지, 백 년 전에 재개발이 되니 마니 했던 곳인데, 철거가 돼도 진작 됐겠지. 요즘 집값은 어떤가. 스마트폰도 없이 어떻게 살라는 거지. 수영이 조금 미워진다. 이틀만 버티면, 어떻게 살아갈지 이틀만 생각해 보면 벗어날 수 있는 건가. 묻고 싶은 게 한가득이지만 하나를 물었다간 열 가지의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너 없는 사이 대박 뉴스 떴어, 배우 한강영의 기억이 몽땅 삭제됐대. 코어 메모리도 몽땅. 그게 무슨 말이냐면, 내가 데이터를 대량으로 지우려면 공인 업체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했지? 사람들이 지울 수 없는 코어 메모리가 있어. 예를 들면 태어났다는 것, 내 이름, 침 삼키는 법 그런 거 말이야. 이건 불법 시술소에서도 지울 수 없는 건데. 그걸 지우는 시도라도 하게 되면 중범죄야. 코어 메모리 삭제죄. 열세 살 이상이면 가중처벌 돼. 왜냐하면 기본적인 도덕관념도 삭제되거든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 것, 생명을 해치지 말 것 그런 거 말이야.
나도 들은 건데 몇십 년 전에 4명이 동반자살을 하려고 모여서 코어 메모리를 싹 지웠대. 어떻게 했냐고? 들어봐봐, 코어 메모리를 삭제하니까 4명이 완전 좀비가 된 거지. 자기가 뭔지도 몰라. 이름은 당연하고 사람인지도 모르는 것 같더래. 모텔에서 퇴실 시간이 넘었는데 안 나가서 문을 여니까 정말 답도 없는 상황인 거지, 다 큰 성인들이 막 바닥에 똥을 싸고 그걸 던지고 먹고 말을 시켜도 멀뚱멀뚱 쳐다만 보더래. 자살하는 방법마저 까먹은 거지, 나중에 밝혀졌는데 그중에 한 명이 공인 업체에 숨어든 정보원이었다나 뭐라나. 그런 소리도 있더라고. 진짜인지는 나도 몰라. 아, 이 기억은 이따가 삭제할래, 일 기가나 잡아먹는 메모리잖아?
암튼 한강영 매니저가 픽업하러 왔는데 연락을 안 받아서 올라간 거야. 근데 한강영이 나체로 진짜 고릴라처럼 그 큰집을 뛰어다니더래, 아무리 불러도 대답도 없고, 기사 사진 좀 봐 대박이지.
한강영이 누구냐면.... 음, 너 옛날에 좋아했던 사이프원 경, 걔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 제일 인기 있는 연예인. 가수들은 거의 없어, 배우들은 자신의 개인 메모리보다 대본, 작품이 중요하다 하는 진짜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해. 암튼 한강영 아깝다. 진짜 잘생겼는데 저게 다 무슨 일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