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동창들. 폭죽 소리와 함께 옥상에서 떨어진 것은 누구인가?
7년간의 복역과 마침표. 바깥은 새삼 많이 변해있었다.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대화가 가능한 AI가 나오고. 그 중 가장 체감이 되는 게 무엇인지 묻노라면 최시온이 답하기에는 온기였다.
하나뿐인 누나가 연인 문제로 투신했다. 억울한 누나를 위해 살인극을 벌였다. 미수로 끝났지만 실형을 피할 수는 없었다. 사이좋은 혈육을 잃는 것은 마치 심장 반쪽을 도려내는 것과 같은 기분. 식어가는 반쪽으로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최시온은 종종 생각했다.
그에겐 네 명의 친구가 있었다. 유치원서부터 알고 지낸 김일현. 땅딸막한 한삼경과 거구의 홍사부. 마지막으로 초등학교 6학년에 전학 와 합류한 안경잡이 박이훈. 그들은 몇 번 면회도 와주었다. 하지만 최시온은 항상 같은 말로 그들을 돌려보냈다.
“고맙긴 한데 이제 오지 마. 남들 보면 범죄자랑 어울린다고 뭐라 할 거야.”
면회는 해가 지날수록 줄었다. 그리고 모두가 뜸해질 쯤 가장 먼저 빠졌던 김일현이 홀로 돌아왔다. 정장을 차려 입은 모습은 어른스러운 느낌을 물씬 풍겼다.
“자리를 잡느라 늦었어. 이번에 금융 회사에 취업했거든. 관심 있으면 말해. 내가 넣어줄게.”
유감스럽게도 최시온이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다른 애들은 어떻게 지내?”
그 물음에 김일현은 표정을 살짝 어그러뜨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렇구나.”
최시온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다른 주제로 넘겼다.
출소 날 마중을 나온 사람은 없었다. 일부러 날짜를 잘못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김일현의 연락은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후였다. 탐정 사무소에서 얘기를 나누던 중 그의 휴대폰으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나왔다며? 저번에 보러 갔는데 섭섭하네. 날짜도 이상하게 알려주고.
“미안. 괜히 신경 쓰게 하기 싫어서.”
-너무 궁상떠는 거 아니야? 친구끼리 미안한 거 없다는데.
“미안.”
-됐다. 그건 그렇고 우리 6학년 때 타임캡슐 묻었던 거 기억하냐?
손가락이 까딱임을 멈추었다. 그 사이 다음 문자가 왔다.
-기억 못 할 줄 알았다. 문방구에서 다 같이 돈 모아서 산 거.
“기억나. 잘은 아니지만.”
-오, 웬일이냐? 그런 거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아무튼 그거 다음 주 토요일이 개봉일이더라고. 안 까먹으려고 주기적으로 타임레터를 보냈었는데 어제 또 왔데. 간만에 다 같이 얼굴이나 함 보자. 내가 연락해둘게.
최시온은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 시점에서 자기를 부른다니, 누가 봐도 친구라 배려해주는 게 아닌가. 최시온은 감정이 깊은 만큼 정에도 약한 편이었다.
‘친구끼린 미안한 거 없다고….’
최시온은 한참을 지나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
***
-토요일 오후 8시. 장소는 우리가 졸업한 초등학교. 6학년 2반에서 불꽃놀이도 볼 예정.
최시온은 김일현에게 전달받은 대로 그들의 모교로 향했다. 마음대로 들어가도 되나 싶었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는 듯 했다. 작년 말, 인원 부족 문제로 학교가 폐교했기 때문이다.
외진 산동네에 위치한 초라한 학교. 최시온은 흙바닥 운동장 한 가운데 차량을 세웠다. 먼저 온 차량은 4대였다. 그래도 버림받은 건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에 그는 가까스로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최시온은 차에서 내려 중앙 조회대를 걸어 올랐다. 창문에 반사된 어슴푸레한 노을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손을 펼쳐 빛을 가리기도 잠시, 나뭇가지 사이로 3층 교실 측 복도에 딱 달라 붙어있는 사람이 보였다. 김일현이었다. 뒤를 돌아보던 그도 마침 최시온을 발견했는지 가볍게 오른손을 흔들었다. 최시온은 멋쩍은 얼굴로 검지와 엄지를 붙여 입에 가져다 댔다.
‘담배?’
김일현은 엄지만 빼낸 주먹을 좌우로 흔들었다.
‘갈래?’
최시온은 좌우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김일현은 어깨를 가볍게 한번 들썩였다. 그리곤 먼저 가 있으라는 듯 뒤쪽 교실을 가리켰다.
‘폼 잡는 건 여전하네. 무서워서 가지도 못할 거면서.’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학교는 일자로 곧게 뻗은 ‘ㅡ’의 구조였다. 입구는 총 세 개로 왼쪽 끝과 중앙, 오른쪽 끝. 원래 각 입구 앞으로 작은 정원이 있어 곧장 꽃들이 보였는데, 이제는 잡동사니들이 입구마다 에둘러 쌓여있어 꽃 한 송이 볼 수 없었다. 꼭 굴뚝이라도 쌓은 것 같았다. 최시온은 그나마 발을 디딜 수 있는 오른쪽 입구를 택했다.
해가 진 학교는 감상에 빠지기엔 적격이었다. 불꽃놀이를 보러 가겠다며 학교에 몰래 숨어들었던 일. 수위 아저씨한테 들켜 따귀를 맞았던 일. 그때 일을 생각하자면 최시온은 괜시리 턱이 얼얼하기도 했다.
후우.
우측 복도의 딱 중간. 6학년 2반 교실 문 앞에 선 최시온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막상 앞에 서려니 어색한 감이 들었다. 그래도 문을 열면 무슨 말이든 나오지 않을까. 그런 게 친구니까. 이내 마음을 다 잡은 그는 문을 열며 입술을 뗐다.
“오랜만이다. 다들 잘 지냈어?"
어째선지 어둑한 교실 안에는 한삼경 한 명뿐이었다.
“이제 왔네.”
“응, 건강하지?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나야 늘 건강하지.”
은근 날이 선 말투다. 최시온은 담담한 척 문을 닫으며 물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근데 다른 애들은?”
“있었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네 명 다.”
“…집에 다시 간 거야?”
“…인상 펴. 너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니까. 그냥 잠깐 머리 식히러 간 거야. 김일현이랑 사부랑 싸웠거든.”
느닷없는 얘기에 최시온이 눈썹을 굽혔다.
“걔네가 싸워? 왜?”
“돈 때문이지 뭘. …뭐야, 너 진짜 아무것도 몰라?”
“무슨 얘기하는 거야? 나 들은 거 없어.”
“…하긴, 우리한테도 비밀로 하고 있던데 너한테 말했을라고.”
한삼경이 뒷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김일현. 걔 사설토토하잖아. 사다리, 바카라 같은 거. 우리한텐 가족이 아프다면서 돈 빌려가려 하더니, 이젠 동창들한테까지 돈 꾸려고 우리 이름 팔고 다닌다더라. 개털 되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리볼빙하고 있는 거지.”
“설마, 뭐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걔 직장도 다닌다고 들었는데….”
“그 직장도 애초에 거기 토사장한테 빚 져서 들어간 거라더라. 어휴, 덕분에 우리까지 싸잡혀서 무슨 면으로 다니는지 모르겠다, 나는.”
“….”
시무룩한 표정을 본 한삼경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누차 말하지만 너한테 한 말은 아니니까 괜히 신경 쓰지 마. 게다가 오늘은 그런 거 잠깐 미뤄두고 추억 팔이나 하자고 모인 거기도 하고. 봐, 그래서 박이훈이랑 저것도 먼저 파 놨다고 하잖아.”
한삼경이 찌그러진 교탁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흙 묻은 조잡한 케이스 한 대가 놓여있었다. 타임캡슐이었다.
“나무가 그대로 있어서 다행이라더라. 근데 뭐, 양심 있으면 그 정돈 지가 하는 게 맞지.”
“이 옆에 치킨이랑 맥주는? 이것도 일현이가 샀어?”
“지가 샀겠지. …왜? 먹고 싶어서? 먼저 먹자 그럼. 어차피 8시도 다 되가는데.”
한삼경이 아무렇지 않게 포장지를 뜯었다. 최시온은 멋쩍은 얼굴로 물었다.
“불꽃놀이에 맞춰서 뜯게?"
“그러려고 8시에 잡은 거 아니겠냐.”
“근데 여기선 잘 안 보일 것 같은데. 창에 시트지 붙어 있잖아.”
최시온이 밖을 바라봤다. 해는 진즉 모습을 감추었다. 한삼경은 답했다.
“다른 데 가면 무슨 의미야. 6학년 2반일 때 친해진 거라 여기로 온 걸 텐데. 말 그만하고 어여 먹어. 안 보이면 나중에 창문 열면 되겠지.”
“뭐야, 왜 벌써 먹어?”
최시온이 교탁으로 다가가자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박이훈과 홍사부였다. 박이훈은 안경을 고쳐 쓰며 휴대폰 시계를 쳐다봤다.
“아직 불꽃놀이 시간 안 됐잖아.”
“배고파서 내가 먼저 먹자했어. 아, 시온이는 건강하다더라.”
홍사부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새 몸집이 더 커진 그는 힘겹게 문을 지나쳐 최시온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말없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고생했다는 의미겠지, 하고 최시온은 짐작했다.
“근데 김일현은? 따라간 거 아니었어?”
한삼경이 종이컵을 돌리며 물었다. 박이훈은 컵을 받으며 답했다.
“삔또 나갔나봐. 잠깐 혼자 있겠대. 화장실만 뒤따라갔다 나 먼저 왔어.”
“물이 아직 나와?”
“몰라? 그냥 쌌는데.”
그 말에 한삼경이 한심하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뭐 어때, 어차피 철거할 건데. 홍사부도 안에서 담배 폈을 걸.”
“난 전자담배잖아.”
“전자 담배는 냄새 안 나나?”
“화장실 창문도 열고 피웠어. 4층이라 냄새도 다 빠졌을 거야.”
홍사부가 말하며 맥주 뚜껑을 열었다. 병 입구에서부터 지린내가 짙게 풍겼다. 최시온의 눈 밑살이 반사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홍사부는 물었다.
“처음 마셔?”
“응. 처음이네.”
“잔만 채워도 돼. 너 원래 이런 거 싫어했잖아.”
“에이, 야. 아무리 그래도 이럴 때는 마셔줘야지. 안 마실 거야?”
박이훈이 맥주병을 가로채며 끼어들었다. 최시온은 애써 웃으며 잔을 받아들었다. 줄줄이 따라지는 맥주잔. 이어 김일현의 잔을 막 앞뒀을 때가 되자, 밖에선 곧 불꽃놀이를 시작하겠다는 MC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삼경은 손에 묻은 치킨 양념을 빨며 말했다.
“그래도 낭만은 있네. MC도 그대로고. 옛날엔 이 멘트 나올 때쯤 수위한테 붙잡혔잖아.”
“너만 아니었으면 그때 봤을 걸.”
박이훈이 말했다. 한삼경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끼었다.
“그게 왜 나 때문이야, 홍사부가 굼떠서 그런 거지. 교실 들어가려다 쟤 다리에 걸려 넘어져 소리 난 거잖아.”
홍사부가 옅게 웃었다.
“난 그래도 첫 번째 폭죽은 봤어. 먼저 들어간 시온이랑 김일현도 봤을 걸.”
최시온이 맥주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그치, 첫 폭죽만 잠깐. 대신 우리가 제일 혼났잖아. 일현이랑 난 따귀도 맞고.”
삼키기엔 역시 역한 냄새였다. 최시온은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 티 나지 않게 맥주잔을 가리며 내렸다. 한삼경은 실실 대며 덧붙였다.
“근데 김일현은 걔가 오버해서 그런 거지. 혼자 급발진해서 갑자기 욕을 박아버리는데 너희였으면 참았겠나. 더군다나 그 시대에 초등학생이 그런 건데.”
“옛날부터 깝죽댔어, 걔는. 허파에 바람만 잔뜩 들어가 가지고. …근데 얘는 왜 안 와? 올 시간 한참 지난 것 같은데.”
박이훈이 장단을 맞추었다. 한삼경은 홍사부의 등을 찌르며 눈치를 줬다.
“전화라도 한번 해보지 그래.”
“내가?”
“싸운 사람이 해야지. 아니면 우리가 하리?”
“…알았어.”
달갑지 않은 표정. 홍사부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쯤 창문 너머로 MC의 카운트다운 멘트가 들렸다. 어느새 불꽃놀이는 10초를 앞두고 있었다. 박이훈은 귀찮다는 듯 중얼거렸다.
“안 오면 그냥 내비 둬. 후까시 잡다 못 보면 그것도 지 탓이지. 먼저 불꽃놀이나 보고 있자.”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창문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5초의 카운트다운. MC의 신난 안내를 따라 네 사람은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2, 1. 그럼 불꽃놀이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당도한 8시. 첫 번째 내측 창이 열리자, 긴 시간 멈춰있던 그들의 단체 채팅방에는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어…?”
동시에 창문 너머로 그들이 보게 된 것은, 거대한 폭죽 빛을 등에 업은 채, 지면으로 빠르게 수직 낙하 하는 의문의 검은 형체였다.
“야, 야, 야! 방금, 방금 그거 뭐야? 사람 아니야?”
커다란 진동과 굉음. 당황한 박이훈이 곧장 두 번째 외측 창을 열어젖혔다. 뒤따라 놀란 한삼경과 홍사부, 최시온도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몸을 들이 밀었다. 빠르게 점등하는 불꽃놀이의 불빛.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것은….
아, 아.
구토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최시온은 입을 틀어막으며 힘겹게 힘겹게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심장이 아렸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번에는 늦지 않았길. 제발 늦지 않았길. 몇 번을 되뇌었다. 허나 끝내 그가 마주하게 된 것은, 투신한 누나를 떠오르게 하려는 듯 처참하게, 잡동사니 속에 머리를 꽂아둔 채 관절을 꺾고 있는 김일현의 시신이었다.
“사, 살아 있어?”
홍사부와 한삼경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려왔다. 최시온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굳게 다문 그의 하관은 경직되어 있었다.
“…아.”
“지, 지금 구급차 불렀어. 김일현은 어떻게…”
뒤늦게 박이훈이 내려왔다. 가라앉은 공기에 그 역시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최시온은 주먹을 꽉 쥔 채 입술을 짓물렀다. 그리곤 한참을 지나 물었다.
“훈아. 경찰에는 연락했어?”
“어, 어?”
넋이 반쯤 나가 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며 친구들을 시신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 앉혔다.
“내가 부를게. 너희는 쉬고 있어.”
경찰과의 통화는 생각보다 짧았다.
“네, 사람이 떨어져서요. 미끄러져서 떨어진 것 같은데, 119에 신고는 했거든요. 그런데 경찰에도 연락해야 할 것 같아서요. 여기가…”
전화를 끊었다. 문득 상단 바에 읽지 않은 채팅이 도착한 게 보였다. 정장을 입은 김일현의 프로필 사진. 긴장한 엄지가 삐걱거리며 화면을 터치했다.
-미안하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네. 정말 미안하다. 나중에 만나면 지금 못 본 불꽃놀이. 꼭 다 같이 보자. 잘 지내라.
짧고 간결한 유언이었다. 김일현답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사이에 끼어있는 한 마디. ‘미안하다.’라는 그 한 마디가 유독 최시온의 심기를 거슬렀다. 최시온은 세 사람을 바라봤다. 무어라 말을 꺼낼까 싶었지만 이내는 삼키고 말았다.
‘…그냥 착각일지도 모르니까.’
그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학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은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1층 복도를 타고 중앙. 그리고 중앙 계단을 네 번 왕복해, 반을 더 오르면 보이는 옥상 층계참. 김일현은 이곳을 지나 투신했을 것이다.
옥상 입구는 녹슨 철문 두 짝이 가로막고 있었다. 대각선 바로 위로는 팔 한 짝이 들어갈 정도로 작은 미닫이 창이 붙어 있다.
최시온은 문손잡이를 잡았다. 짧은 심호흡 한 번. 그는 눈을 질끈 감곤 양 손잡이를 잡아 앞뒤로 흔들어봤다. 짤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10cm보다 작은 공간. 주먹 하나 들어갈 틈새로 동그란 두 개의 문고리에 쇠사슬과 자물쇠가 걸려있는 게 보였다. 김일현이 뛰어내리기 전 잠근 듯 했다.
최시온은 문 틈새로 이마를 가져다 붙였다. 터진 시멘트 포대와 깨진 벽돌, 기다란 쇠막대기들, 풀려있는 현수막. 그리고 가장자리에 떨어진 짓밟힌 담배 한 개비. 로고는 보이지 않았다.
“저… 선생님?”
순간 놀란 최시온이 뒤를 돌아봤다. 경찰이었다. 어느새 밖은 잦아든 폭음 대신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경찰은 물었다.
“신고자인 최시온 씨 맞으신가요?”
“…아, 네, 제가 신고했습니다.”
“여기서 뭘 하고 계셨죠?”
최시온은 안을 가리켜 말했다.
“혹시 유서가 있을까 해서요. 자살하면 그런 경우가 많다고 하니까요.”
“뭐가 있던가요?”
“종이 같은 걸 봤어요. 포대자루 뒤로 날아간 건지 지금은 안 보이지만.”
경찰관이 최시온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최시온은 덧붙였다.
“제가 왔을 때부터 잠겨 있었어요.”
“그래 보이네요. 잠깐 비켜주시겠어요.”
굵직한 손이 뻗어 나와 양 손잡이를 앞뒤로 흔들어 당겼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전기를 꺼내 들어 동료 경찰에게 연락했다. 트렁크에서 절단기를 가지고 올라오라는 내용이었다. 상황으로 보아 경찰도 김일현이 자살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듯 했다.
쇠사슬은 얼마 안 가 절단됐다. 문을 열자, 양쪽 문손잡이에 여러 겹 둥글게 말린 쇠사슬이, 각기 두 개의 꼬리를 늘어뜨리며 우리를 반겼다.
옥상은 4쌍의 초록색 환기탑이 2열 횡대로 늘어서 있었다. 환기탑의 기둥 부분에는 헤진 현수막이 줄줄이 묶여 있었으며, 벽면과 바닥에는 스프레이로 적은 성희롱과 욕설, 그림, 시멘트입자가 흩뿌려져 난무했다. 경찰은 그런 것 따위 일절 관심 없다는 듯 있지도 않은 유서를 찾아 헤맸다. 그 사이 최시온은 아까 본 담배 한 개비를 유심히 살폈다. 말보로 레드. 김일현이 초등학생 때부터 피던 담배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시선이 멈춘 곳은 6학년 2반과 동일한 축. 옥상의 가장자리였다. 우연인지 이쪽 라인의 현수막들만 모두 난간 위로 몸을 빼고 있었다.
“선생님!”
최시온이 난간 가까이 다가가자 놀란 경찰이 달려와 그를 제지했다.
“여긴 철조망이 없어서 위험해요. 1층에 먼저 내려가 계세요. 유서는 저희끼리 찾아보고 나중에라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최시온이 무의식적으로 손바닥을 긁었다. 그저 기시감일까, 아니면 불신일까. 찝찝한 걸음은 4층으로 향했다. 과학실. 6학년 2반 바로 위 교실이었다.
통, 통.
창문 너머로 옥상에서 봤던 현수막 끝자락이 바람에 날려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짧아.’
똑, 똑.
현수막이 창문을 재차 두드렸다. 불현듯 어지럼증과 경미한 열감이 느껴졌다.
“….”
탁.
현수막이 다시 한 번 창문을 세게 쳤다. 최시온은 잡념을 떨치려 고개를 털어냈다.
‘창가 주변에 먼지는 균일해. 신발 자국 같은 것도 없고. 다음으로 봐야할 건 4층에 다른 교실. …여기도 마찬가지야. 그럼 창문이 열려있는 우측 끝 화장실을 제외하곤 특이점은 없는 건가. 좌측 라인은… 보지 말자.’
잡념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최시온은 복잡한 심경을 억지로 짓밟으며 3층으로 내려갔다. 중앙 계단. 그리고 우측으로 뻗은 4개의 교실. 내부는 모두 같았다. 삭은 목재 교단과 허우대 멀쩡한 LED TV, 책걸상 몇 개와 찢어진 포스터. 마지막은 다시 6학년 2반이었다.
기억 상 변한 건 없다. 낡은 교단엔 타임캡슐이 그대로 올라가 있었고, TV도 화면이 뜯긴 채. 망가진 책걸상도 개수와 위치가 그대로였다. 심지어는 맥주와 음식들조차.
하.
곰곰이 생각하던 최시온이 갑자기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타임캡슐을 쓰다듬으며 읊조렸다.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 어중간하게 자꾸….”
그는 타임캡슐을 든 채 창문으로 다가갔다. 저 멀리 학교 아래로 스포트라이트가 솟아올라 학교를 비추고 있었다.
‘폭죽. 그때라도 같이 봤어야 했는데.’
찰나의 감상에 빠진 최시온이 창문을 열었다. 첫 번째 내측 창을 지나 두 번째 외측 창. 아름다웠어야 할 배경을 대신 해, 창문 아래로 보인 것은 누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머리를 숨기고 있는 김일현의 시신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깔린 멀쩡한 TV와 책걸상. 잡동사니들. 모두 똑같았다.
‘밧줄 같은 건 없구나. 역시 자살인 걸까.’
손바닥을 긁던 그는 다시금 헛웃음을 토해냈다.
‘아니, 진짜 뭘 하고 싶은 거야.’
최시온이 창문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딱딱거리며 몇 번인가 이마가 부딪혔다.
“선생님, 거기서 뭐하십니까. 위험하니까 얼른 내려오세요.”
1층 입구에선 친구들과 함께 경찰이 최시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놔두고 온 게 있어서요. 금방 내려갈게요.”
최시온이 무덤덤하게 타임캡슐을 흔들어 보였다.
‘모르겠다. 매스꺼워. 토할 것 같아. 그만 할래.’
힘 빠진 왼손이 창문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다 중간 쯤, 손끝이 무언가에 걸려 멈추었다.
‘이건….’
손톱질은 점차 신경질적이 된다. 접착제. 그가 긁어낸 것은 테이프 접착제와, 검고 얇은 막의 파편이었다.
불쾌함이 느껴졌다. 최시온은 그 자리에서 두 발 물러났다. 휴대폰 플래시에 의존해 보길, 내측 창과 외측 창 가장자리에는 톱밥처럼 자잘하게 일어난 테이프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테이프 자국은 김일현이 지나친 창문에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우리 반만 TV 화면이 없던 거였나. 고작 편광필름 하나 때문에.’
교실 문은 닫혔다. 최시온은 1층으로 내려갔다. 우측 출구 앞에는 경찰 두 명이 서 있었다.
“아, 안 그래도 올라가려 했는데. 너무 늦게 나오셨네.”
“화장실 좀 다녀왔어요. 오랜만에 기름진 걸 먹었더니 배가 아파서.”
경찰관은 눈살을 좁혔다.
“뭐 건드리거나 그러신 건 아니시죠?”
“딱히요.”
최시온이 계속 무표정하게 있자 경찰은 주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여기 허락받고 들어온 게 아니시더라고요. 친구 분들껜 먼저 말씀 드렸지만, 건물 소유주 분이랑 나중에 따로 합의를 보시던가 해야 할 것 같네요.”
“신분증 필요한가요?”
“확인 좀 하겠습니다.”
경찰은 수첩을 꺼내 인적사항을 간략하게 옮겨 적었다. 이후로 오간 대화는 알리바이에 대한 것이었다. 그 시간동안 어디서 뭘 했냐고.
“정리하자면, 김일현 씨를 마지막으로 본 건 조회대를 올라올 때였다는 거네요. 그사이 박이훈 씨가 김일현 씨를 따라갔지만 결국 따로 떨어져 2층 화장실로 가게 됐고, 홍사부 씨는 4층 우측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에서 혼자 담배를 태우셨다. …맞나요?”
“아마도요.”
“아마도?”
“저는 박이훈이랑 홍사부는 보지 못 했거든요. 교실에 들어갔을 땐 삼경이, 네. 저 키 작고 다부진 친구 혼자였어요. 몇 분 지나서 박이훈이랑 사부가 같이 들어왔고요.”
“일단 알겠습니다.”
옥상 문이 잠겨 있어서 그런 걸까. 아직까지 딱히 모순점을 찾지는 못한 듯 했다. 추후에 따로 연락이 갈 수 있다는 말을 끝으로 최시온은 귀가해도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
“뭘 했는데 이렇게 늦게 와?”
경찰이 물러나자 한삼경이 다가와 물었다.
“배가 좀 아파서. 너희는 뭐 별다른 조사 같은 거 안 했어?”
“알리바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 물었지.”
“채팅 얘기는? 단톡방에 올린 거.”
“그건 처음에 하고. 아, 그리고 유서 얘기도 하던데. 네가 뭔 종이 봤다며?”
“아, 응. 그랬지. 없었대?”
“어, 다 뒤져봤는데도 유서 같은 건 없었대. 찾아보고는 있는데 잘못 본 걸 수도 있다더라.”
“…그래? 잠깐만. 저기 형사님.”
최시온이 무전을 주고받는 경찰을 불렀다.
“옥상은 정말 다 뒤져보신 건가요.”
“유서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옥상은 확인했습니다. 학교 부근도 수색 중이니 혹시라도 나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 없었나요? 현수막이 워낙 깨끗해서 그 속으로 엉켜들어갈 법도 하다 보는데.”
거듭 묻자 경찰이 콧김을 내쉬었다.
“현수막은 꽤 삭아있었습니다. 하나같이 손만 대도 보풀이 일고 천이 갈라질 정도로요. 들어보니 보풀이랑 헷갈리신 것 같습니다만, 혹시 모르니 다시 한 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럴까요. 있었으면 차라리 더 나았을 텐데.”
“예?”
“아뇨, 혼잣말이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만 가자, 시온아.”
홍사부가 최시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우리도 이만 가야지. …다들 괜찮으면 내가 태워줄게. 나는 술 안 마시기도 했고.”
“괜찮겠어?”
“참을 만해. 그리고 지금 아니면 내가 언제 또 너희를 태워주겠어.”
세 사람이 수긍했다. 괜찮아 보이는 듯 했지만 세 사람의 얼굴에는 아직 미묘한 경직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얼마안가 운동장에 도착했다. 끝에 놓인 미니쿠퍼가 최시온이 타고 온 차량이었다.
“이야, 벌써 차도 샀어? 심지어 미니쿠퍼네. 뭐 복권이라도 당첨 됐나봐?”
박이훈이 억지로 톤을 끌어올렸다. 그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사장님한테 빌렸어.”
“사장님? 그새 취업 한 거야?”
“응, 인턴 느낌으로 탐정 사무소에.”
“탐정? 흥신소 말하는 거야?”
“맞아.”
“어지간히 이상하네, 너희 사장도. 아무리 그래도 쌩판 남인데 직원한테 자기 차를 빌려주나. …야, 근데 이거 우리가 다 타면 좁아터지겠다. 사부는 거의 몸을 접어서 타야할 지경인데. 그냥 택시 부르는 게 좋지 않겠어?”
“종종 그리울 때가 있더라고.”
“그리워?”
“친구끼리 살 부대끼고 그러는 거. 어쩔래? 안 탈 거야?”
“오글거리게.”
겉치장뿐인 웃음. 네 사람은 차량에 탑승했다. 미니쿠퍼는 전조등을 키고 학교 정문을 빠져나왔다. 빵빵 터지는 행사장의 사운드가 지면을 타고 차체 안으로 전해졌다.
“…결국 이번에도 못 봤네, 불꽃놀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한삼경이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다 같이 봤어야 했는데. 아쉽네.”
박이훈이 답했다. 최시온은 백미러를 흘기며 말곁을 넣었다.
“글쎄. 아마 그럴 일은 없었을 거야.”
세 사람이 이맛살을 구겼다. 무슨 말이냐는 반응이었다. 최시온은 고개를 전면으로 되돌리며 말을 이었다.
“애당초 들키게 돼 있었거든. 학교에 숨기로 했던 거. 일현이 때문이지. 걔는 불꽃놀이 보는 거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아, 아니, 아니, 잠깐.”
박이훈이 의아해했다.
“그거 보러가자고 꼬드긴 거, 애초에 김일현이었잖아. 근데 별로 원하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최시온은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답했다.
“처음부터 얘기를 꺼낸 게 나였어. 하교할 때, 내가 걔한테 외롭단 식으로 떠들어 댔거든. 남들은 가족이랑 불꽃놀이도 보러 가는데, 나만 왜 집에 짱 박혀 있어야 하냐고. 그러더니 지가 나서서 너희들 꾀겠데. 지 나름대로 눈치 보지 말라고 신경 써 준 거겠지.”
“답네, 다워. 똥 폼을 잡는 게 진짜.”
박이훈이 말했다. 한삼경은 이마를 긁으며 반문했다.
“근데 그게 들킨 거랑 뭔 상관이야.”
“상관있지. 그날 오전 수업 끝나고 걔가 따로 만난 사람이 있었으니까.”
“따로 만나?”
“수위 아저씨 말이야.”
세 사람은 흠칫 놀랐다.
“걔랑 나랑은 원래 하굣길에 맨날 같이 갔었잖아. 근데 그날만 먼저 가라 하더라고. 여자 친구라도 생겼나 싶어서 뒤따라갔는데, 어디로 들어간 줄 알아? 수위 아저씨 휴게실이었어. 그리고 그 안에서 말하는 걸 똑똑히 들었어. ‘6학년2반 애들이 오늘 학교에 몰래 숨을 거래요. 불꽃놀이 보려고요.’라고 하는 거. 일러바친 거지.”
“뭐야, 그럼 걔는 지가 가자하고 일부러 걸려서 뺨을 맞았다는 거야? 뭐 때문에 그런 짓까지 한 거래?”
박이훈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최시온은 답했다.
“고소공포증 때문이겠지.”
검지가 까딱거리며 운전대를 두드렸다.
“나도 나중에 알았어. 수련회에서 레펠 탈 때, 안 타려고 꾀병 부리는 거 보고. …폼은 잡고 싶은데 막상 저지르고 나니 겁이 난 걸 거야. 불꽃놀이 보려면 창문에 몸을 들이밀어야 할 테니까.”
“아니, 에바지. 그게 뭐 대수라고. 걔 진짜 무슨 가오가 몸을 지배하고 그런 거야?”
한삼경이 기가 차다는 듯 반응했다. 홍사부는 점잖게 말했다.
“요점은 그거구나. 김일현이 옥상에 갈 리 없다고.”
그러자 볼륨이 단번에 수그러들었다. 정적을 실은 미니쿠퍼가 한 차례 파란불을 지나쳤다. 최시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끊어진 말길을 이었다.
“부차적인 거긴 하지만 그래. 옥상에는 난간 하나 없었으니까. 고소공포증 있는 애가 굳이 담배를 피러 거기 갈 이유가 없다고 보거든. 또 친구끼리 미안한 거 없단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애가 유언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할 리도 없고. …자살을 마음먹은 사람이 평소랑 다른 게 당연한 거 아니냐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난 걔가 내 눈앞에서 뛰어내렸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걔는 그런 애니까. 그래서 옥상에 갔던 거야, 나는.”
최시온이 눈알을 굴렸다. 검은자위는 조수석을 향한 채 멈춰있다. 눈치를 보던 한삼경은 최시온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아, 아! 야, 옥상! 근데 옥상은 잠겨 있었다며. 쇠사슬이 걸려 있었다는데 어떻게 안으로 들어갔겠어? 엿듣기론 일현이가 핀 담배도 나왔다고 경찰이 그랬고. 게다가 난 김일현한테 그런 말버릇이 있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기분 탓이지, 기분 탓. 안 그래? 아하하….”
“그래서?”
조수석에 앉은 박이훈이 한껏 낮아진 어조로 말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냥 찔러보려고 한 말은 아닐 거 아니야. 너 그런 애 아니잖아.”
최시온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검지가 핸들을 두드렸다.
“맞아. 살인은 불가능하지. 문자는 예약이고, 담배는 미리 던져뒀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더라도 옥상 출입문은 바깥에서 쇠사슬로 잠겨 있었으니까. 창문이라 봐야 어깨만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작았고. 우리 중 누가 김일현을 죽이고 그 틈새로 옥상을 빠져나올 수 있었겠어.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일현이를 정확하게 8시에 떨어뜨릴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고 보거든. 일현이랑 짜고 친 게 아니라면.”
“그래?”
“그렇지. …근데 말이야. 어찌 생각해보면 방법이 또 아예 없진 않겠더라고. 옥상 밀실이나 김일현의 추락. 두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훈아. 나는 너 말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두드림의 간격이 짧아진다. 진한 눈썹은 이제는 대놓고 조수석을 향해 있었다. 박이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검지 손톱만 긁어댈 뿐이다. 삭막한 분위기에 한삼경은 재차 최시온의 어깨를 쳤다. 강도가 강해졌다.
“에이, 야. 아까부터 왜 자꾸 그래. 얘도 착잡할 텐데. 우리끼리라도….”
그러자 최시온이 갑자기 성을 냈다.
“그래, 우리끼리! 우리끼리니까 경찰한테 말도 안하고 참고 있던 거잖아 지금!”
미니쿠퍼가 갓길에 급정거했다. 그는 커다래진 동공으로 한삼경을 노려봤다.
“내가 지금 무슨 심정으로 꾸역꾸역 참고 있는 건지, 너희가 알기나 해?”
“…최시온?”
“처음엔 기시감이었어. 투신한 누나처럼 내가 놓친 사정이 일현이한테 있던 건 아닐까하는 기시감. 근데 파면 팔수록 이상하게 느껴지더라?”
최시온이 손톱을 세워 흉 진 손바닥을 긁었다.
“점점 불안해졌어. 만약 내가 정말 맞으면 어쩌지? 정말 살인이면 어쩌지? 나중에 가선 구역질까지 올라오려 하더라? 그래도 참았어. 설마 정말 너희가 그랬으려고. 대가리가 짜개질 것 같으면서도 단서를 찾으려 했다고. 왜! 나는 정말 너희가 일현이를 죽이지 않길 바랐으니까. …근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무리 찾아봐도! 이번 일도 역시 자살은 아닌 것 같더라. 아니야, 박이훈?”
“….”
“뭐든 말을 좀 해봐. 응? 왜 그런 건데?”
“….”
“…야, 말을 좀, 뭐라도 말을 좀 해달라니까? 왜 갑자기 입을 다문 건데. 돈 때문에 그런 게 후회돼서 그러는 거야? 아님 그냥 들킨 게 억울해서? 응? 뭐라도 말을, 말을 좀, 말을 좀 해보라고 이 미친 새끼야!”
최시온의 호흡이 점차 가빠졌다. 두 손은 까득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운전대를 꽉 붙잡았다. 그걸 본 홍사부가 최시온의 어깨를 차분히 주물렀다.
“시온아 잠깐. 너 너무 흥분했다. 우리 잠깐 머리 좀 식히자.”
홍사부가 창문을 내렸다. 멀리선 이번 노래를 끝으로 불꽃놀이와 함께 축제를 마치겠다는 MC의 멘트가 들렸다. 그는 긴 간격을 두어 점잖게 말했다.
“솔직히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지금 내가 네 기분을 모두 이해한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한 번 본 걸로도 머리가 아직 욱신거릴 정도인데, 넌 두 번이나 이런 일을 겪은 거니까. 고달팠을 거야. 힘들었겠지. 분명 우리가 짐작조차 못할 정도로. …그래도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네가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도 듣고만 있을 순 없지 않을까? 우리가 네 감정 쓰레기통은 아니잖아.”
“감정 쓰레기통?”
“너 지금 이러는 거. 그냥 분풀이 하려는 걸로 밖엔 안 보인다고.”
홍사부가 눈짓으로 백미러를 가리켰다. 거울에 비친 최시온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우리도 바보는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얘기 그냥 듣고만 있는 거. 나름 친구니까 배려해주는 거라고 생각은 해봤어야지. 이해했니?”
“….”
“그래, 이해한 것 같네. 그럼 이제 그만하고 가서 쉬자. 다들 피곤하겠다. 너나 우리나.”
“…그러니까 너는 정말 내가 그냥 기분이 나빠서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였구나.”
“…하아, 시온아 쫌, 응?”
홍사부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우리도 바보는 아니라고 방금 말했다. 하물며 경찰은 더 그렇고. 우릴 이렇게 보내준 거 보면 단순 추락사니까 그런 거…”
“그러니까! 나도 아까부터 말하고 있잖아. 옥상이 밀실이었단 점이나, 일현이가 정확히 8시에 떨어졌다는 점이나, 그런 건 이제 상관없다고. …아니면 뭐, 나 같은 범죄자 새끼 말은 이제 들어줄 필요도 없다 그건가? 우린 친구도 뭣도 아니니까?”
홍사부가 엄지를 들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리곤 다소 거친 억양으로 외쳤다.
“아 쫌! 최시온. 작작하라니까? 네가 이런 식으로 꼬장 부린다고 자살이 살인이 되는 줄 알아?”
“자살이라고?”
“그래, 자살! 너희 누나도 김일현도 혼자서 뛰어내린 거잖아! 그냥 자살한 거잖아! 내 말이 틀려?”
홍사부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계속해서 외쳤다.
“그리고 또 뭐? 우리가 안 그러길 바랐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넌 그냥 자위질 하고 싶었던 거잖아. 그때 일을 끝맺지 못한 게 한이 돼서, 그게 뇌리에서 좀처럼 떠나질 않아서! 우리한테 분풀이 하려는 거잖아. 그러니까 쫌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친구니 뭐니 들먹이면서 애먼 사람 살인자로 몰아가지 좀 말라고, 쫌! 어? 알아들어?”
거친 호흡과 싸늘한 정적.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홍사부는 별안간 아차 싶었는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최시온. 그의 눈꼬리는 이전과 달리 새빨갛게 번져 있었다. 홍사부는 앞머리를 흐트러뜨리며 곧장 사과했다.
“아니. 미안하다, 미안. 내가 실언을 했네. 미안. …하아.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진짜 미안한 말이지만 네가 너무 섭섭하게만 생각지는 말아줬으면 해.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어서 그런 거니까. 그러니까 이제 너도 그만하고 좀 편해지자. 부탁이다. 응? 시온아.”
“그건 살인이었어.”
목소리에서 옅은 울먹임이 묻어났다. 홍사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곤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답했다.
“…끝까지 그렇게 떼를 쓰는구나. 좋게 감상 질해도 안 들어먹으면 뭐, 여기서 조목조목 반박해주는 수밖엔 없겠지. 너 원래 주먹질보단 팩트로 후드려 패야 알아듣는 스타일이잖아?”
홍사부가 콧김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커다란 등이 시트에 딱 달라붙었다. 그는 눈을 감으며 아까 있던 상황에 대해 잔잔하게 읊었다.
“백보 양보해서 네 말처럼 이게 살인이라고 치자. 그럼 범인은 불꽃놀이 직전 김일현을 옥상으로 데리고 갔을 거야. 그리곤 기절을 시키든 죽이든 했겠지. 누가 뛰어내리랬다고 김일현이 ‘그래, 좋아.’ 이럴 놈은 아니니까. 다음은 적당한 시간에 맞춰 김일현이 떨어지도록 장치를 해두면 돼. 도구로 쓸 수 있는 건 시멘트 포대랑 현수막 정도가 있겠고. 맞지?”
오른손이 삐져나와 허공을 뱅글뱅글 돌았다.
“옥상 구조는 나도 무전을 엿들어서 얼추 알아. 환기탑이랑 환기탑에 묶인 현수막, 터진 시멘트 포대, 쇠파이프. 그중 범인은 환기탑 기둥에 연결된 현수막을 길게 내빼, 김일현 몸에 에둘렀을 거야. 그리곤 6학년 2반과 같은 축 옥상 가장자리에 죽은 김일현을 비스듬하게 걸쳐뒀겠지. 몸 절반만 밖으로 내빼는 식으로. 다음은 현수막의 반대쪽 끝을 시멘트 포대 밑에 깔아두고 포대에 구멍만 내면 뭐, 깔아둔 현수막이 서서히 풀리면서 김일현이 알아서 떨어지지 않겠어? 말마따나 담배랑 채팅도 미리 준비해뒀겠다. 옥상 문도 잠갔겠다. 그럼 남은 건 옥상 밀실을 탈출하는 것뿐이잖아.”
홍사부가 어깨를 작게 들썩였다.
“너는 그럼 또 분명 그것도 현수막만 있으면 된다고 하겠지. 수련회에서 했던 레펠처럼 그냥 옥상에서 타고 내려오면 된다고 본 거거든. 외진 동네에 해가 진 폐교. 주변에 상가도 없는 학교에서 현수막을 타고 내려와 봤자 누구한테 들키기나 하겠나. …3층에선 현수막 같은 게 보이지도 않았어. 그러니 옥상에서 3층으로 곧장 타고 내려오는 건 무리. 쭉 교실에 있었던 한삼경은 제외일 테고. 내가 현수막을 타고 내려오기엔 또 무게가 나가는 편이라 무리. 자기 자신은 당연하게도 제외. 그럼 남은 건 그나마 왜소한 훈이뿐이잖아. 넌 그래서 훈이를 더러 범인이라고 하는 거 아니야?”
“그건 너무 우연에 기댄 얘기 같은데.”
듣고 있던 한삼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말이 그 말이야.”
홍사부가 왼손을 펼쳐가며 동조했다. 질려버린 표정이었다.
“다른 거야 다 그렇다 쳐. 근데 폭죽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김일현이 떨어지도록 했다니? 우리가 공학자도 아니고 그 타이밍을 일일이 어떻게 맞춰? 예행연습이라도 했게? 그나마 현실성 있는 방법이라 봐야, 몸에 밧줄 같은 걸 걸고 창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잡아당겨 김일현을 떨어트리는 걸 텐데, 그런 건 보지도 못했고.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최시온은 곁눈질로 박이훈을 살폈다. 침묵. 박이훈은 계속 멍하니 손가락만 문댈 뿐이다. 최시온은 콧김을 내쉬었다. 그리곤 엄지로 눈가를 지그시 닦으며 답했다.
“맞아, 말도 안 되지. 현수막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았고, 길이도 짧았으니까. 4층 창문에 간신히 닿을 정도였거든. 그걸 타고 내려왔다면 홍사부. 굳이 네가 아니더라도 중간에 떨어졌을 거야. 근데 그런 걸로 일현이를 또 고정하겠다면 누가 납득이나 하겠어?”
손끝에서 물이 묻어났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곤 착잡한 얼굴로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희는 처음부터 착각을 하고 있던 거라고. 왜 너희는 김일현이 옥상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
“생각을 좀 해 봐. 내측 창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바깥에서 폭죽이 터졌어. 또 거의 동시에 폭죽 빛을 등에 업은 불규칙한 그림자가 지면으로 떨어졌고. 진동과 굉음에 놀란 박이훈이 외측 창을 여니, 1층 화단 잡동사니 위에는 일현이가 꽂혀 있었지. 이 과정에서 우리가 일현이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은 있어?”
“하, 난 또 무슨 말을 하나 했네. 그런 건 제대로 보지 못해도 알 수 있어."
홍사부가 곧장 반문했다.
“다른 게 떨어진 거라면 잡동사니들 위에 꽂힌 게 김일현이 아니라 다른 거였어야 하니까. 아니, 다른 물건이라도 그래. 그 아래 쌓여있던 책상, 의자, TV, 컴퓨터. 모두 무게가 있는 것들인데 그걸 교실 안에서 도대체 어떻게 떨어…”
불현듯 홍사부가 말을 멈추었다. 동공은 순식간에 확장된다. 그는 뻣뻣해진 고개를 돌려 조수석을 바라봤다. 박이훈의 손톱 끝에는 테이프 자국이 들러붙어 있었다.
“이제 알겠어? 처음부터 옥상에서 떨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고.”
“아니, 아니. 잠깐 기다려 봐. 난 이해가 안 가는데. 너희들끼리만 말하지 말고 나도 좀 이해가 가게 설명을 해달라고.”
“편광필름을 쓴 거야.”
최시온이 내비게이션을 향해 눈짓을 했다.
“TV나 모니터에 붙이는 필름 말이야. 결을 따라 빛을 선택적으로 투과시키는 필름. 박이훈은 가장 먼저 이곳에 와 내측 창과 외측 창에 편광필름을 붙여뒀을 거야. 겉보기엔 한 장의 시트지를 붙인 것처럼 상하 이등분된 크기로 결을 맞춰 한 장씩만. 주변엔 빛도 없었으니까 맨 눈으론 알아채기 힘들었을 테고, 설령 들키더라도 낡은 시트지가 떨어진 것처럼 넘어갈 수 있었겠지. 근데 그 상태로 불꽃놀이 타이밍에 맞춰 창문을 열면 어떻게 되겠어? 테이프로 고정해둔 위쪽 편광필름이 떨어지면서 결끼리 수직이 되는 순간이 생겨. 창문에는 그림자처럼 불규칙한 형태가 생기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럼 우리가 본 게 단순히 편광필름이었다고?”
“그래. 그러니까 이번 일은 마지막까지 일현이와 같이 있던 사람. 불꽃놀이에 맞춰 창문을 연 사람. 떨어진 게 사람인양 선동한 사람. 그리고 우리가 내려간 사이 남은 편광필름을 제거할 수 있었던 사람. 당연하게도 박이훈말고는 불가능했다고. …하, 근데 참 대단해? 폭음이 낙상 소리와 진동을 대신할 수 있다지만, 누가 먼저 창문을 열어버리면 그림자 같은 건 연출도 못 했을 텐데. 친구를 기만하기에 이만큼 조잡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 또 있을까. 더군다나 같이 다니던 학교에서, 이딴 방식으로 개좆같은 기억만 떠올리게 만들고. 도대체 무슨 정신 머리였던 거야? 이런 허술한 트릭이 정말 안 들킬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아니, 그래도 해결되지 않은 게 아직 하나 있어.”
홍사부가 입술을 짓누르며 말했다. 얼굴에서 당혹이 묻어났다. 아니, 어쩌면 믿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편광필름은 그냥 가능성의 얘기잖아. 손가락을 만지작대던 것도 그냥 치킨 양념 묻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옥상을 잠근 쇠사슬은 어떻게 설명하려고? 경찰이 절단기까지 들고 올라간 거면 어지간히도 단단히 묶인 걸 텐데.”
“맞아, 단단했지. 풍채 좋은 경찰이 있는 힘껏 당겨도 틈새만 살짝 벌어진 정도였으니. 주먹 하나. 틈새는 거의 그 정도였어. 근데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거든. 밀실을 만들고 빠져나올 방법이. 현수막은 당연히 필요도 없고. …어떻게, 박이훈. 뭐라도 말을 해보지 그래? 네 친구가 저렇게 기다리는데.”
“….”
“하긴, 억울하단 말 말고 할 말이 있겠냐. 너 같은 새끼들은 언제나 그런 식이더라고. 인정할 줄 모르고, 비겁하게 도망만 다니고.”
그 말이 거슬렸던 걸까. 박이훈이 째진 눈으로 최시온을 노려봤다. 창밖에선 이제 폐회식을 진행하겠다는 MC의 멘트가 작게 들렸다. 최시온은 박이훈을 무시하며 답했다.
“옥상 문 사선 방향으로 작은 창 하나가 달려 있었어. 담배꽁초를 옥상에 던져두곤, 나오기 전에 손잡이에 쇠사슬을 적당히 걸어뒀겠지. 몸만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그 후엔 옥상 층계참으로 들어와 창문에 어깨를 집어넣어. 옥상에 있던 쇠파이프로 사슬 사이를 반복해 오가며 문손잡이에 계속 걸어주면 그 밀실 같지도 않은 밀실은 완성이야. 너희는 못 봤겠지만, 손잡이에 걸린 쇠사슬이 꼬리를 각기 두 개씩만 늘여놨던 게 그 방증이고. 제대로 묶어뒀으면 바닥에 끌리는 쇠사슬이 여러 개였어야 하겠지.”
“하."
“…웃음이 나오냐?”
“그럼 안 웃게 생겼냐? 말하기도 전에 다 들켰는데. …뭘 그렇게 쳐다 봐? 아, 너도 아니꼬운 가보다. 네 뒤꽁무니나 쫄래쫄래 쫓던 애가 이제 대가리 좀 컸다고 개기니까. 왜? 속에서 뭐가 막 끓어? 김일현처럼 뺨이라도 쳐볼래?”
“이런 미친 새끼가…!”
“야, 야! 일단 놔! 잡지 마. 하지 말라고.”
한삼경이 엉겨 붙으려는 두 사람을 가까스로 뜯어놓았다. 박이훈은 최시온의 멱살을 뿌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맞았다고. 내가 걔를 1층에서 죽이고 다리까지 다 부러뜨린 거야. 근데 말이야, 너는 내가 걔를 왜 죽였는지, …아니, 하다못해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궁금한 적은 있냐?”
자연스럽게 나오는 범죄자의 자기 합리화. 최시온은 경멸하는 것이었다. 이내 분을 참지 못한 최시온은 한삼경을 떨쳐내고 박이훈의 어깻죽지를 잡아당겼다. 허나 그뿐, 최시온은 끝내 주먹을 날리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게 오랜만에 마주 본 박이훈의 표정은 마치 긴 세월의 한을 억눌러왔던 것처럼 진하게 배어나는 슬픈 감정을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7년 전의 밤. 누나의 복수를 감행했을 때의 자신처럼.
“그래, 그럼 그렇지. …야, 최시온. 그래도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물어보자.”
박이훈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주름진 턱은 어쩐지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너는, 너는 나를 친구로 생각한 적은 있냐?”
“….”
“그래. 결국 김일현 말이 맞았던 거구나. …자수는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 어차피 시간만 잠깐 벌려고 했던 거고, 너희한테 피해가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잘 지내라. 삼경아, 사부야. …그리고 최시온.”
차 문이 거세게 닫혔다. 뒷좌석 창문을 통해 MC의 마지막 멘트가 스며들었다.
-모두 재밌게 즐기셨나요? 이번이 마지막 불꽃입니다! 축제에 와주신 분들 모두! 앞으로도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가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안녕!
마지막 폭죽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성대하게 터졌다. 그리곤 한순간에 사라졌다. 박이훈은 외톨이가 되어 짙은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그가 남겨 놓고 간 것이라곤 그림자 하나가 전부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화선처럼, 길고도 선명하게 늘어져 어딘가에 똬리를 틀고 있을지 모를 기나긴 도화선.
이틀 후 저녁 최시온의 휴대폰으로 문자 한 통이 왔다. 홍사부였다. 박이훈은 그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크게 다퉜다고. 그 직후 바로 자수를 했다고 한다. 답장은 보내지 못했다.
“안 열어봐도 됩니까? 그 케이스.”
탐정 사무소 사장이 최시온에게 물었다.
“아침부터 계속 만지작대던데. 표정도 뚱하고. 못 열고 왔나 봅니다.”
“열었어요. 깨서. …보시겠어요?”
“그래도 됩니까?”
타임캡슐 내부는 곳곳이 얼룩 져있었다. 얼룩 색깔이나 마모 정도가 다 다른 걸로 보아 중간마다 열었단 것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안에는 다섯 명이 함께 찍은 사진 한 장과 함께, 박이훈의 생일 롤링 페이퍼가 들어있었다. 최시온은 사진을 꺼내 사무소 사장에게 보여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곱상하셨네요. 인기도 많았겠어요.”
“….”
“나름 농담이었는데 재미없었나 봅니다. 미안해요. 개그는 잘 못하는 편이라.”
“그것보다 뒤를 한번 봐주시겠어요.”
“뒤요?”
사장이 사진을 뒤로 뒤집었다. 그곳에는 짤막한 글귀가 적혀있었다.
‘친구끼리 미안한 거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고민이 생기면 뭐든 솔직하게 털어놔 줬으면 좋겠다. 나랑 친구해줘서 고마워. 얘들아.’
“순박한 친구네요. 성함이… 박이훈. 이 안경 쓰신 분이 쓴 건가요?”
“어떻게 아셨어요?”
“롤링페이퍼랑 글씨체가 같았거든요. 근데 타임캡슐치곤 한 사람 물건이 유독 많은 것 같은데요.”
“그러게요. 알고 보면 간단한 건데 저는 왜 착각을 하고 있던 건지.”
최시온이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차피 금방 탄로 날 거, 자수라도 권해서 형량이라도 낮췄으면 했는데….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모르겠네. 처음부터 꼬인 걸까요?”
“무슨 일이 있었나보군요.”
최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걸지도 모르죠. 뭐가 됐든 너무 상심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모든 선택에는 후회가 따른다고 하니까요. 제가 보기에 시온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사장이 사진을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시온은 답했다.
“사장님.”
“말씀하시죠.”
“오늘은 제가 문을 닫아도 될까요? 슬슬 퇴근 시간인데.”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그럼 그러시죠.”
사장은 차 키를 건네받으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곤 무언가 생각난 듯 뒤늦게 덧붙였다.
“아 참, 이전에 말씀드린 직원 면접 말입니다. 그건 일단 보류하도록 하죠. 시온 씨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인수인계가 어느 정도 될 때까지는 기다리겠습니다. 그게 시온 씨한테도 좋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사장이 문을 닫았다. 최시온은 사무실 불을 껐다. 희미해지는 초점을 따라 박이훈이 전학 왔을 때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흐릿할 뿐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의자가 삐걱거린다. 눈을 감는다. 오늘 꾸는 꿈은 아마 짙고도 역한 악몽일 것 같다고, 최시온은 생각했다.
***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강인한 군인. 그와 달리 어머니는 연약했다. 몸도 정신도. 나는 어머니를 닮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가는 곳마다 표적이 되었다.
어느 날 한번 머리에 지우개 가루를 달고 온 적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께 울며 부탁을 드렸다. 학교에 그만가고 싶다고. 아버지는 답했다. 혼자 이겨내야 한다고.
말 수가 줄었다. 아버지가 의젓해졌다고 좋아했다. 어머니도 좋아했다. 나는 말수를 더 줄이기로 했다. 내게는 아무 일도 없는 게 되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세 번째 전학을 가게 됐다. 아버지는 이번이 마지막 전학일 거라고 했다. 상관없었다. 어디를 가든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
전학 첫날, 나는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나를 건들지 않았으면 했다. 종소리가 울렸다. 쉬는 시간이 됐다. 곱상하게 생긴 아이가 다가와 내 이름을 불렀다.
“박이훈.”
또 때리겠지 싶었다. 나는 멍하니 앉아 그 아이를 바라봤다. 또래와 다르게 어른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최시온. 나는 처음으로 맞지 않았다.
시온이와 함께 다니게 됐다. 시온이 친구들과도 친구가 됐다. 처음으로 학교를 다니는 게 즐거웠다. 고마웠다. 먼저 말을 걸어준 시온이도, 다른 친구들도.
시온이는 감정을 드러내는 편이 아니었다. 표정도 어른들처럼 여유로워 보이고, 또 한 편으로는 가식적인. 외롭고 생각이 많아보였다. 친구로서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시온이는 말해주지 않았다. 미안했다.
초등학교 6학년. 김일현한테 시온이 가족에 대해 전해 들었다. 안타까웠다. 나는 시온이가 말해줄 때까지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중학교에 입학했다. 곤조가 있던 김일현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형, 누나들과 어울리며 술, 담배를 권했다. 삼경이와 사부가 말했다. 일현이는 옛날부터 과시욕이 있었다고. 그래도 괜찮았다. 나한테만 조금 모질게 대했을 뿐, 우리한테는 그러질 않았으니까.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시온이가 누나 일로 고민이 많아졌다. 시온이가 개인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되자, 우리도 조금씩 마찰이 생겼다. 대개 김일현의 패악질이 문제였다. 한삼경과 홍사부는 늘 같은 편이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공감을 하면서도 일현이 편을 들어주려 노력했다. 우리 사이가 깨지길 원치도 않았고, 김일현이 외톨이가 되는 걸 바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시온이네 누나가 자살했다. 시온이는 혼자 있는 일이 더 많아졌다. 우리 사이의 균열도 커졌다. 홍사부와 일현이는 주먹질 직전까지 갔다. 말리는 게 일상이 되었다. 김일현은 언제나 그렇듯 자기 잘못이 없다며 구시렁거렸다. 참지 못했다. 따로 있을 때 나잇값 좀 하라고 한 마디 했다. 그러자 김일현이 눈을 부라렸다.
“놀아주니까 진짜 뭐라도 된 줄 아나보네.”
울컥했다. 얘는 나를 친구로 생각지 않고 있던 걸까. 할 말이 많았지만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터지면 또 다시 그 시절처럼 혼자가 되지 않을까 두려웠지 싶다. 나는 주먹만 움켜쥐곤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김일현한테 사과를 받았다. 사부와 함께 얼굴이 부어 있었다. 괜찮지 않았다. 괜찮다고 말했다. 우리는 다시 친하게 지내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시온이가 범죄를 저질러 수감됐다. 다 같이 면회를 갔다. 시온이는 미안한 얼굴로 우리를 항상 돌려보냈다. 내가 싫었다. 친구가 그 지경이 되도록 아무것도 몰라줬다니, 그런 걸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첫 면회가 끝나고 김일현이 담배를 피며 거들먹거렸다. 언젠가 시온이가 일을 낼 것 같았다고. 같잖은 허세라고 생각했다. 홍사부도 싫증이 났는지 그 자리에서 따졌다. 알고 있었으면 왜 안 말렸느냐고. 김일현은 괜히 목소리를 깔며 답했다.
“친구가 뭔 줄 아냐? 그냥 오래 알고 가깝게 지낸다고 친구가 아니야. 개좆같은 일이라도 일단 하려고 하면 편이 돼주는 거. 그런 게 친구지.”
김일현답게 시답지 않은 얘기였다. 홍사부는 무슨 얼빠진 소리냐며 김일현을 쏘아붙였다.
“어째 애가 점점 병신이 돼 가냐.”
“병신은 너희지. 쫄보 새끼들.”
김일현은 혼자 지껄이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 김일현과는 연락이 잘 닿지 않게 됐다. 그나마 연락이 되는 사람은 나 혼자. 아니, 어쩌면 다른 애들은 연락 자체를 안 했을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 둘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필요할 때만 딱. 그렇게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연락을 피한 적은 없었다. 뜬금없이 돈을 빌려 달라 하면 빌려주고, 동창생의 번호를 물어보면 알려주고. 자존심 강한 친구가 가족을 팔면서까지 나한테 돈을 빌려갈 거라곤 생각도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한테 만이라도 솔직히 말해준 게 내심 고맙기도 했고….
얼마안가 일현이와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홀로 있을 시간이 필요한 거라 생각했다. 다음 연락을 기다렸다.
다음 소식은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들었다. 일현이랑 연락되느냐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가족이 아파서 돈을 빌려줬는데 그 돈으로 토토를 하고 있었단다.
“…에이, 아닐 거야. 아무리 정신 나갔어도 그 정도까지 갔으려고. 어, 어. 나도 연락 안 한지는 좀 됐는데, 아니, 싸운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일단 나도 한번 알아볼게. 응, 잘 지내고 다음에 봐.”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편을 들어주었다. 한동안 가만히 앉아 생각했다. 아무래도 찾아가봐야 될 것 같았다. 가자마자 돈 얘기를 꺼내면 부담스러워하겠지. 그래도 이번 기회에 생각 고쳐먹고 다시 다 같이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데.
문득 알량한 핑계 거리가 생각났다. 타임캡슐이었다. 낭만이니 체면이니 같은 걸 좋아하는 놈이니, 기억하고 있다면 잘 먹히지 않을까. 그래도 뜬금없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내심 불안했다. 그래서 타임레터라는 복선을 깔아두기로 했다. 핑계를 위한 핑계였다. 자연스럽게 타이밍이 맞아 떨어졌다고 하면 어느 정도 얘기는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학교에 묻은 타임캡슐을 찾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위치도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날, 집 앞 마당에 나 혼자 따로 묻어둔 똑같은 타임캡슐을 파내기로 했다.
안이 얼룩덜룩했다. 주기적으로 열 때마다 흙이 들어가서 그런 것 같았다. 사진 뒷면에는 내가 영화를 보고 감명 받아 적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김일현은 그 말을 유독 좋아했던 것도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일현은 그 영화를 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만남. 나는 타임캡슐과 음료 박스를 싸들고 김일현네 집으로 찾아갔다. 초라한 빌라. 우체통에는 독촉장과 카드 할부 청구서가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걸 도로 넣고는 1층 문을 두드렸다. 문신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누구냔다. 일현이 집이 아니냐고 물었다. 얼마 안 있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김일현이 나왔다. 상의를 벗고 있었는데 전신 타투를 새겨 넣은 게 보였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 왔냐?”
김일현이 담뱃불을 붙이며 말했다. 보는 사람도 있으니 밖으로 가자고 했다. 김일현이 비웃으며 답했다. 어차피 볼 사람도 없고, 곧 이사도 갈 거라 무시해도 된다고. 한심함에 제도 혀를 차버렸다. 그러자 김일현은 당장에라도 때릴 것처럼 혀를 찼다. 무서웠다. 그래서 눈을 내리깔았다. 안에서 비웃음이 들렸다. 김일현은 쫄지 말라며 내 목을 툭툭 쳤다.
어찌어찌 밖으로 나왔다. 나는 분을 삭이며 음료 박스를 건넸다. 안부 인사를 전하니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애들 쫄래쫄래 쫓아다니는 게 어째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대가리가 컸으면 나이 값 좀 하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됐고. 이거 기억해? 옛날에 묻은 건데.”
짜증을 삼켰다. 타임캡슐을 들이밀었다.
“3년 주기로 타임레터를 보냈거든. 타임캡슐 까자고. 올해 마침 발송됐더라고.”
“그래서 뭐?”
“…시온이도 좀 있으면 나오잖아. 간만에 애들끼리 모여서 얼굴이나 보자. 타임캡슐도 내가 미리 파놨으니 만나기만 하면 되잖아. 학교 폐교했다니까 거기서 봐도 될 것 같은데. 불꽃놀이 축제 기간이기도 하고. 좋지 않나?”
“아, 불꽃놀이. 맞네. 그런 일이 있었네.”
김일현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야, 근데 3년 주기면 올해는 아니지 않나? 이거 6학년 때 묻었잖아. 불꽃놀이 들키고.”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뭐라 핑계를 대지. 우물쭈물 거리자 김일현이 다 알아봤다는 듯 콧방귀를 끼었다.
“참나, 야. 그렇게 외로움 많이 타서 어떻게 살려 그러냐?”
“나올 거야, 말 거야. 그거나 말해. 슬슬 짜증나려고 하니까.”
“나가 줘야지. 그렇게까지 부탁하는데. …근데 불꽃놀이는 옥상에서 보냐?”
“6학년 2반에서 보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우리 그때 같은 반이었으니까.”
“됐다, 그럼. 시간 정해지면 톡으로 보내놔. 시온이한테는 내가 연락할 테니.”
“혼자가면 돌려보낼 걸.”
“돌려보내긴. 면회 시간 꽉 채워서 잘 떠들고 왔는데.”
김일현이 거드름을 피웠다. 평소처럼 그냥 무시하면 될 일이었다. 분명 그럴 텐데 어째선지 나는 이번만큼은 그러질 못했다.
“…근래 갔나 봐?”
“갔지. 근래에.”
“뭐라디?”
“뭐라 하긴 그거야…. 표정 봐라. 궁금한 거야? 불만인 거야?”
“궁금한 거야.”
“그러시겠지.”
김일현이 바닥에 가래침을 뱉으며 이어 말했다.
“회사 얘기했어. 어차피 걔 출소하고 나면 오갈 데도 없잖아. 아, 너 걔 출소한 거는….”
진짜 얘기했구나. 더는 듣기 싫었다. 나는 김일현의 말을 끊으려 작위적으로 손뼉을 쳤다.
“이야, 대단하네. 김일현.”
뜬금없는 반응에 김일현의 얼굴에는 물음표가 생겼다. 무슨 말을 해야 얘 기분을 잡칠 수 있을까. 아, 그런 게 있었지.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친구, 친구하더니만 기껏 한다는 게 그딴 똥통에 친구 끌고 가려했던 거야? 양심 뒤졌나봐.”
“…뭐라 했냐?”
“다 들었어. 토토 한다며. 너.”
김일현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동네방네 소문 다 낫더라. 가족이랑 친구 팔아서 돈 빌리고 다닌다고. 왜 그렇게 사냐?”
“이야 참, 나이를 먹긴 했나보다. 네가 그딴 식으로 말도 하고.”
“이 정도 말도 못할 사이는 아니잖아? 우리.”
“지랄하네.”
짤막한 웃음. 김일현이 담뱃재를 털었다.
“너 그냥 샘나서 씹통대는 거잖아 지금. 최시온이 나한테는 다 말해줬는데 너한테는 아무 말 안 해 줬다고. 아니냐?”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어째 변한 게 없네, 변한 게.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목 빠져라 기댈 줄만 알지 혼자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너는. 잘 생각해봐. 최시온이 왜 유달리 너한테만 아무 말도 안 했는지. 너 걔네 집안 사정 들어본 적은 있냐?”
“다물라고.”
“네가 생각해도 뻔하지?”
“야!”
피가 단숨에 끓어올랐다. 귀에서 삐소리가 났다. 오른손은 어느새 김일현의 옷깃을 붙잡고 있었다.
“뭐? 어쩔 건데?”
불현듯 어깨 너머로 1층 베란다가 보였다. 다른 문신 돼지들이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손이 후들거렸다.
“이래서 걔가 너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 거야. 끽해봐야 너는 걔한테 자기처럼 사정이 있는 불쌍한 새끼거든. 의지도 도움도 안 되는 애새끼.”
김일현이 팔을 내쳤다.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가서 그 병신쫄보들한테나 잘해. 최시온한테처럼 팽 당하지 말고. 간다. 약속 잡히면 문자 보내라.”
김일현이 다시금 내 뺨을 두어 번 건드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모멸감인가. …아니, 내가 느끼는 것은 그보단 상실감에 가까울 것이다. 심장이 산 채로 뜯겨나갔다는 통증과, 빈 공간으로부터 느껴지는 상실감.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친구라고 꾸역꾸역 참아왔는데, 부모보다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김일현.”
꽉 쥔 주먹이 바지자락을 힘껏 붙잡았다. 나는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줄곧 생각해봤는데 나는 역시 처음부터 네가 싫었네. 시답잖게 힘자랑하고, 시온이 같이 있어 보이는 애들 눈치는 더럽게 보면서 나 같은 애들은 알게 모르게 무시하고. 그러면서 유쾌한 척 이미지는 다 챙겨가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짜증났다고. 알아?”
“이야, 진짜 개찐따같네. 그래, 쌓인 것도 많을 텐데 고생했겠다.”
“그래, 오래도 참았던 거지. 진짜 오래도. 근데 이제는 도무지 참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네. 우리 친구 아니었잖아? 안 그러냐? 너도 나 친구로 생각 안 하잖아?”
“뭘 새삼.”
“…이번이 마지막 모임일 거야. 알아서 처신해. 다른 친구들한테는 피해 안 가게.”
“너나 잘하지.”
“나는 늘 잘하지. 너랑은 다르게.”
나는 그날, 김일현을 죽이기로 했다. 아마 되돌릴 수는 없겠지.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감정은 이미 내 손을 떠나버렸으니까.
불꽃놀이처럼 터져나간 김일현의 모습을 본다면, 그때의 너희는 과연 나를 친구로서 조금이나마 이해해주려고 할까. 그저 혐오스럽게만 쳐다볼까. 내가 너희에게 진정한 친구이자 가족이었으면, 최시온이 자수했을 때처럼 씁쓸한 표정을 지어주길.
…그리고 시온이는 누님이 돌아가셨을 때처럼 조금은 고뇌를 해주길. 이기적이고 표독한 생각이지만 나는 친구들이 그래주길 바랐다. 너희는 내게 있어 전부였으니까. 내 심장은 너희들로 채워져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시온이와 비슷한 방식을 택하려는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