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부로 발령받았습니다

육아휴직 복직자, 어디로 보내야 할까요

by Just Be

숫자와 사람의 경계에서


저는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그렇지만 또 그렇게까지 메이저하지는 않은 금융권 공공기관 중 한 곳을 다니고 있습니다. 지난 8년간 제 일은 숫자와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분기별 실적, 달성률, 다음 분기의 목표. 숫자는 명쾌했고,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과정의 복잡함은 때로 희미해졌고, 평가는 소수점 아래 두 자리까지 정확하게 떨어졌습니다. 그것이 제가 알던 세계의 질서였습니다.


올가을, 저는 인사부로 발령받았습니다. 제가 마주한 새로운 세계는 숫자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시간은 엑셀 시트처럼 평평하지 않았고, 마음의 무게는 계량할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십수 년 치 평가 기록을 들여다볼 때, 한 줄의 고충 뒤에 숨은 고통을 마주할 때, 저는 종종 제가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탐사대원 같다고 느낍니다. 이곳의 공기, 언어, 중력은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어쩌면 이 낯섦을 길들이기 위한 저 자신의 생존법일지 모릅니다. 무언가를 기록하지 않고서는 그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오랜 습관 탓이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인사(人事)를 궁금해합니다. 채용의 막후, 평가의 기준, 인사이동의 원칙 같은 것들. 때로는 단단한 벽처럼 느껴지는 그 결정들이 어떤 고민과 딜레마 속에서 이루어지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이 기록은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드릴 수는 없을 겁니다. 특정 인물이나 사건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등장하는 모든 상황과 대화는 신원을 알아볼 수 없도록 익명화되고 재구성될 것입니다.


제가 담아내고 싶은 것은 정답이나 비판이 아니라, 선택의 순간에 마주하는 딜레마의 무게, 제도를 운영하며 손끝으로 느끼는 실무의 감각입니다. 공정과 유연성 사이의 팽팽한 긴장, 원칙이라는 잣대와 현실이라는 땅 사이의 거리, 그리고 그 속에서 분투하는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을 과장 없이 그려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정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니라, 질문과 함께 걸어가는 여정의 기록입니다. 제도와 사람 사이, 그 아득한 거리를 재어보는 조용한 관찰기이기도 합니다. 부디 이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조용한 공감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작은 통찰의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날의 냄새 : 기록의 무게


9월 초. 사무실의 온도는 23.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깜박이는 컴퓨터의 전원 버튼 불빛 아래, 랙(Rack)들이 내뿜는 미지근한 공기가 뺨에 와 닿았다.


낮고 규칙적으로 울리는 HR시스템의 구동음(駆動音)은 지난 8년간 익숙했던 숫자들의 세계와는 다른 종류의 언어처럼 들렸다.


이전 부서에서 나의 세계를 구성하던 것은 분기별 실적, 달성률, 다음 분기의 목표 같은 명쾌한 숫자였다. 엑셀 시트 위에서 합산되고, 평균 내어지고, 그래프로 그려지던 그 숫자들은 차갑지만 정직했다.


인사부로 발령받은 첫날, 나는 이 HR시스템 안에 약 1,000명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들의 입사일, 고과, 연봉, 교육 이력, 누군가의 기쁨과 다른 누군가의 곤란함이 모두 이곳의 서류와 파일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부장님은 내게 인사정보시스템 접속 권한을 부여하며 말했다.


“이번에 복직하는 C씨 파일을 한번 열어보세요. 감을 익힐 겸.”


화면에는 ‘C씨’라는 익숙한 이름이 떴다. 몇 번 복도에서 마주치며 목례를 나눈 적 있는 얼굴. 어느날 육아휴직을 사용했던 그가 이번에 복직을 희망했다. 그의 사번을 클릭하자, 한 사람의 15년이 압축된 디지털 지층(地層)이 펼쳐졌다.


입사일, 최초 발령 부서, 승진 기록, 매 반기 매겨진 근무성적평정(S, A, B, C, D), 가족사항, 희망근무지, 이수했던 교육 목록, 심지어 과거에 받았던 경미한 수준의 징계 기록까지. 스크롤을 내릴수록 한 사람의 시간이 픽셀 단위로 분해되어 눈앞에 쌓였다.


이전 부서에서 다루던 숫자는 ‘결과’였다. 특정 기간의 성과를 요약한 스냅사진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숫자들은 한 사람의 ‘과정’ 그 자체였다.


어느 해의 ‘B’ 등급 옆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까. ‘S’ 등급을 받았던 해, 그는 어떤 성취감에 잠 못 이루었을까. ‘팀장 리더십 과정’이라는 교육 기록 뒤에는 어떤 고민이 숨어 있었을까.


숫자는 여전히 숫자였지만, 그 행간에는 침묵하는 서사가 빼곡했다. 이전 부서의 숫자들이 평면 위에 놓인 점이었다면, 이곳의 숫자들은 깊이를 가진 우물이었다. 들여다볼수록 어둡고 아득했다.


나는 문득 인사카드가 빼곡하게 정렬되어있던 캐비닛에서 풍겨 나오던 오래된 종이와 토너 냄새를 떠올렸다. 그 냄새는 단순히 기록의 냄새가 아니었다. 천 명의 시간이 퇴적되며 만들어낸 고유한 체취였다.


내가 앞으로 만져야 할 것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누군가의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의 무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우스를 쥔 손에 희미한 땀이 배었다.


딜레마는 명확했다. 시스템은 이 모든 기록을 객관적인 ‘데이터’로 처리하라고 요구한다. 평가의 계량화, 보상의 차등화, 인력의 효율적 배치. 모든 것이 숫자에 기반한 합리적 판단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그 숫자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자존감과 연결되고, 한 가정의 내일과 맞닿아 있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공정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원칙과, 개별적 인간이 처한 현실 사이의 긴장. 그것이 앞으로 내가 짊어져야 할 업무의 본질인 듯했다.


나는 조용히 C씨의 파일을 닫았다. 아직은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운 기록이었다. 그저 ‘처리’해야 할 정보가 아니라, 신중하게 ‘이해’해야 할 한 사람의 역사였다. 잠깐의 휴식 후 사무실로 돌아오자, 아까와 같은 HR시스템의 낮은 구동음이 들렸다.


하지만 이제 그 소리는 다르게 들렸다. 그것은 기계의 소음이 아니었다. 천 명의 시간을 쉬지 않고 기록하며 쌓아가는, 거대하고 조용한 숨소리였다. 시스템의 낮은 울음은, 밤새 계속될 것이다. C씨의 복직 근무지를 어디로 해야할까. 그가 희망하는 부서에는 이미 모든 자리가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