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 그늘 아래에서

by 길벗

그늘을 찾게 되는 계절이다. 그늘에도 격이 있다. 누구는 여름날 다리 밑이 제일 시원하다 하고 또 누구는 사방이 확 트인 시골마을 정자나무 아래 평상이 가장 좋다 한다. 다 좋다. 그러나 운치를 따지자면 나는 등나무 그늘에 한 표다. 옛날 휑한 시골학교 교정에 어김없이 자리하며 무더위를 식혀주던 그 등나무다. 등나무 꽃에 꿀이 많아서인지 벌이 윙윙 날아다니는 게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등나무 그늘 아래 시원한 아이스케키 하나 물고 있으면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이나 다름없었다.


등나무는 화투에도 등장한다. 4월을 지칭하는 '흑싸리'가 등나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일컫기도 하지만 더운 날 이만큼 실속 있는 나무도 없다. 예전에는 초여름 무렵 꽃이 피었는데 이제 4,5월이면 꽃이 포도송이처럼 다닥다닥 달린다. 꽃이 지면 무성한 이파리가 발치에 넉넉하고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줌으로써 사람들의 이야기꽃까지 피우게 한다.


잘 아는 사실이지만 '갈등'이란 말도 등나무에서 나왔다. '갈(葛)'은 칡을, '등(藤)'은 등나무를 가리킨다. 칡은 왼쪽으로 물체를 감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으며 뻗는다. 칡과 등나무는 같은 덩굴나무이고 둘 다 덩굴이 가볍고 질겨서 잘 끊어지지 않으면서 서로 반대 방향을 추구한다. 결국 서로 엉켜 풀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한다. 갈등이다. 옛사람들은 실한 줄기로 지팡이를 만들기도 했지만 다른 물체 또는 제 어미의 목을 감아 죽이는 등나무 덩굴을 천대했다. 결국 등나무를 없앨 것인가 등나무가 감고 올라탄 나무를 없앨 것인가 고민하게 된다. 이 또한 갈등이다. 우리네 삶 역시 갈등의 연속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좋으련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일찍 찾아온 더위가 한여름 걱정을 앞당긴다.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던 시절도 잘 지냈는데 더운들 어떠랴 싶어도 열대야, 찜통더위 같은 단어들이 이런저런 갈등으로 얽히고설켜있는 머릿속을 달구기 시작한다. 그 옛날 등나무 그늘 아래서 시원한 물 한 바가지에 행복해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어리다고 갈등이 없었겠냐마는 그래도 갈등이란 단어를 몰랐던 그 시절이 좋았다. 모처럼 등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보니 유년 시절의 추억이 알알이 달려 있는 듯 풍성한 등나무 꽃이 그리 아름답고 풍성해 보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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