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찾아온 대만 우롱차 입덕기
2014년 6월의 일이다. 당시 나는 마이리얼트립이라는 여행 스타트업에서 단 하나뿐인 만능열쇠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엔 현지 여행 가이드를 중개하는, 요즘과 비교하면 꽤 심플한 서비스였고 주력 지역 중 하나가 대만이었다. 한국에서 고객을 받았지만 서비스는 어디까지나 현지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마케팅용 후기 이미지나 동영상도 현지 가이드나 고객이 준 것을 사용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플랫폼을 제작하는 디자이너나 개발자들도 손을 보태 마케팅용 이미지나 영상을 제작하고, 실제 서비스되는 상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보자는 목적 아래 10명도 안되는 인원 전원이 첫 해외 워크샵을 떠났다.
노는 게 아니라 진짜 “워크”샵이었고, 여행 가이드와 한국인스러운 관광 일정을 소화하려면 정말 일정이 빡빡했는데 비용을 아낀다고 공용 샤워실과 화장실을 이용하며 매트리스도 안깔린 도미토리 이층침대에서 자느라 창업자 이외 대부분 30대였던 멤버들은 개인 일정이나 단합 모임은 커녕 골골대기 바쁠 지경이었다.
2박 3일의 일정에서 마지막날, 딱 하루였다.
그날은 가이드와 함께 하는 관광 프로그램 일정이 없었다. 몇 시까지 알아서 타오위엔 공항에 도착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늘 가이드와 다니며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차를 사고 싶어했는데, 어디서 무엇을 사면 되는지 어떤 가이드도 뾰족한 답을 주지 않았다. 화롄까지 택시로 왕복 8시간을 오가며 뒷자리에 탄 개발자들이 자는 사이 온갖 스몰토크를 주고받았던 택시기사 겸 현지인 가이드가 차 좋아하면 차시장 같은 데 가지말고 백화점 브랜드를 사는 게 낫다는 조언을 해줬을 뿐이다.
그래서 얼추 나에게는 세 시간의 자유시간이 생겼는데, 다른 동료들이 까르푸에 가는 동안 성품서점에 가는 단독 행동을 하기로 했다. 성품서점은 한국의 교보문고 같은 종합 서점이지만, 사실상 핫트랙스이기도 하고 신세계백화점이기도 한 엄청난 복합문화공간으로, 꼭대기층에 차 매장이 엄청 많은 지점이 있다고 (구)직장동료 (현)여행전문가님의 블로그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타이페이는 시내 각 포인트끼리 거리가 멀지 않은 편이니 택시타고 슝 갔다오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자력으로 대만 내에서 어딘가 돌아다녀본 적이 없었으므로, 타이페이 메인 스테이션에서 헤어진 후 캐리어를 코인락커에 넣고, 무작정 구글맵에 성품서점의 영어이름 eslite bookstore를 입력했다. 한국에서도 시내에서 교보문고를 검색하면 광화문점이 제일 먼저 나오니까 분명 꼭대기층에 차를 판다는 가장 큰 지점이 나올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대만 택시기사님들은 대부분 친절하지만, 연령이 높아 눈이 나쁘다. 자신있게 핸드폰 지도 어플을 보여주자마자, 천천히 돋보기 안경을 끼고 한참 들여다보셨다. 지도 근처의 어딘가에 내려준 것 같긴 한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당연하다. 그 지도의 핀이 가리킨 곳은 오피스가 빌딩의 작은 지하 지점이었기 때문이다.(그런 데 교보문고 지점이 있다는 게 한국인으로서는 좀 상상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울면서 서점 직원에게 사정을 손짓발짓으로 설명했더니, 메모지에 한자 주소를 적어주며 택시를 타라고 했다.
내가 가야 했던 성품생활 송얀점은 이곳이다. 심지어 성품서점이 아니고 성품생활이야..? 알고보니 서점보다 백화점 비중이 높은 곳은 서점이 아니라 생활이라는 브랜딩을 하고 있었고... 이 급의 서점이 서울 중심 시가지 영역보다 크지 않은 도시에 보통 많은 게 아니었고... 이 나라 사람들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 건가? 싶을 정도다.
요즘은 트리플에도 위치가 등록되어 있다.
그렇게 성품생활 송얀점에 도착했을 땐 이미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 (다소 넉넉하게 잡은)예상시간까지 딱 40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교보문고 가서 스피커 방송으로 쫓아낼 때까지 서점에 죽치고 앉아서 10대를 다 보냈던 인간인데... 그곳은 천국이었다. 하지만 천국을 딱 10분만 둘러보고 눈물을 흩뿌리며 백화점 한 층에 해당하는 면적을 차 매장으로만 쓴다는!!! 그 놀라운 곳으로 가야만 했다.
확실히 고급스럽고 큰 매장들이 많았으나, 중국어도 하나도 모르고 서양 브랜드 홍차들이나 깰짝 마셔본 나에게는 어디부터 들어가서 물어봐야 할 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정확히 우롱차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이 땅에서 나는 차를 기념품으로 사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일정 내내 내 돈을 써본 적도 없기 때문에 타이완 달러와 한국 환율 계산도 머리에서 전혀 안되는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본능적으로 구석을 찾아 차 우리는 사람이 있는 제일 끝 매장으로 들어갔다. 혼자 한 시간 넘게 길바닥을 헤매며 기초 수준의 영어조차 안 통하는 데 답답함을 느끼다가, 차를 우리며 영어로 말을 걸어주는 것이 너무 반가워 그 매장에 빨려들어가고 말았던 것 같다.
매장 직원인 듯한 사람이 나한테 앉아보라더니, 이걸 마셔보라면서 차를 우려줬다. 그리고 이건 우롱차(Oolong Tea)인데, 우롱차라는 건 홍차처럼 발효도 하고 이 차 특유의 baked된 공정이 추가되어 독특한 향이 생긴다는 설명을 해줬다.
그리고 산화 및 굽기(전문용어로는 홍배라고 한다) 강도에 따라 여러 종류의 차가 있고, 자기네 매장에서는 등급과 가격도 촘촘히 나뉘어져 있어서 전부 시음해보고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오, 아이가릿!이 절로 나오는 절묘한 영어듣기평가였다.
그래서 약한 발효 및 약한 굽기의 문산포종부터, 중간 발효 및 중간 굽기의 동정우롱, 거의 구운 맛이 지배해버리는 철관음까지 단계별로 몇 가지를 시음해보았다.
맨 처음 게 제일 좋은데요?
그 다음엔 여러 등급의 차를 비교시음하게 해주었다. 처음에는 중간 등급의 차부터, 좀 윗등급 차를 마시게 하더니, 오 윗등급이 낫네요! 했더니 좀 올라가다 제일 윗등급 차를 마시게 됐고 그 차의 맑은 꽃향이 좋았던 나는 결국 그걸... 샀다. 나에게 차를 열 잔은 족히 내어준 듯 한 매장 직원은, 포장도 직접 보는 앞에서 진공으로 해주며 하는 말이 결국 그걸 사게 되어 있었다며 웃었다.
더해서, 그것보다 조금 발효하고 홍배한 차를 중간 정도 등급으로 샀다. 합해서 300g이었다.
오타쿠에게 입덕은 교통사고처럼 온다는 인터넷 관용어가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하게 치여서 빠져든다는 뜻이다. 하지만 수많은 덕질을 하면서도 그런 강렬한 순간이 자주 오진 않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그 모먼트였던 것 같다.
이당시 샀던 차는 유기명차라는 브랜드의 차로,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차 생산자로 대를 이어 차를 만들고 있으며, 현재는 거의 모든 백화점에 입점되어 있는 고급 브랜드이다. 코로나 이슈로 해외배송을 안 했는데, 이 글을 쓰려고 들어가보니 좀 복잡한 방식인 것 같지만 요청하면 한국으로 해외배송을 해준다고 한다.
이당시 입덕으로 이끈 차는 문산포종이란 우롱차의 gold label 등급이다. 대만에서 차는 600g 한근 기준으로 판매되는데, 1/4인 150g을 최소수량으로 구매 가능하다.
https://shop.wangtea.com.tw/product/index/Wen-Shan-Pouchong-Tea
문산포종은 발효와 홍배 과정을 5~10% 이내로 약하게 거친 차로, 싱그러운 풀향과 꽃향이 겹치고, 달고 상쾌한 맛이 지배해 우롱차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좋아할 수 있는 차다. 대만을 대표하는 차 중 하나로, 대만 편의점에 가도 문산포종 페트병 음료가 있는 정도. 심지어 그것도 맛이 훌륭하다. 대체로 금훤우롱같은 저지대에서 재배된 차보다는 비싸고, 고산우롱보다는 싸다.
그렇게 홀린 듯 300g의 차를 한국돈 10만원 좀 안 되는 돈을 주고(당시 대만돈은 부루마불 돈 같아서 얼마 썼는지 감도 없었다) 산 뒤 서점을 나와 다시 택시를타고 타이페이 메인 스테이션 역으로 돌아갔다. 캐리어를 찾는 데까지도 별 문제 없었는데, 공항으로 가는 버스 터미널을 찾는 게 문제였다.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데는 약 1시간이 소요되고, 터미널은 두 개로 나뉘어 있었다. 웨스트 스테이션에서 찾아서 타야 한다지만, 웨스트 스테이션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요즘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타이페이 한복판에서 로밍 신호가 매우 미약하게 터지고 있어서 지도 앱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차를 사느라 돈을 다 써서, 내 손에는 버스요금만이 달랑달랑 들려 있었고, 편의점에서 카드를 넣으면 돈을 찾을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타오위엔 공항은 한국으로 따지면 인천공항 포지션이라, 시 외곽까지 택시를 타고 가면 얼마가 나오는 지도 계산이 안 되는 지경이었다.
대만 사람들은 비록 웨스트 스테이션이나 고 스트레이트 아이 캔트 차이니즈 잉글리시 플리즈 같은 간단한 영어도 통하지 않았지만 좋은 의미로 오지랖이 넓은 사람들이라, 어느 타이페이 공무원이 주저앉기 직전인 나를 공사장을 거쳐 도보 15분 넘는 거리의 버스 터미널에 직접 데려다 주었다. 하지만 약속 시간에는 한참 늦었고 비행기를 못 타서 회사에 손해를 끼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침착하게 목을 씻자... 1시간동안 타오위엔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오도카니 앉아 그런 생각만 했다.
다행히 공항 도착 후 다비켜!! 아임레이트!!!!! 를 외치며 탑승구까지 초고속으로 뛴 덕에 탑승시간에는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었고 심지어는 비행기 출발 자체가 지연되어서... 공항 도착 후 1시간 반이 지나서야 출발했기 때문에 다행히 그 상황은 잘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동료가 걱정했으니 왜 그랬는지 알고싶어했고 차를 사느라 그랬다니 정말 황당해했다.(으이구 하면서 웃어넘겨주었던... 정말 좋은 사람들....)그 워크샵을 같이 갔던 동료들과는 여전히 가끔 연락하며 잘 지내고 있지만, 지금까지 이러고 사는 걸 구체적으로 안다면 더 어이없어할 것 같다.
그 뒤로도 좋은 게 많은데 즐기지 못한 게 한이 되어, 그 워크샵을 리벤지하러, 차를 더 사서 마시고 싶어서, 저가항공이 만만해서 몇 번을 오가며 여행자의 깜냥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차를 마셨다.
대만은 정말 차를 마시기 좋고 외국인에게도 프렌들리한 곳이였다. 일본 교토면 언어 좀 할 줄 알아봐야 지인이라도 없으면 좋은 티룸 같은 데는 발끝도 못 들이밀텐데... 그냥 아무나 들어가도 되는 전통 찻집도 있고, 차나 다구를 다루는 어느 매장에서나 좌판을 벌이고 차를 끓여먹다가, 파파고나 일본어, 영어를 통해서 어설프게 물어보면 귀찮을 법도 한데 최대한 친절하게 답해 줬다. 차가 이렇게까지 생활에 스며들 수 있구나 하는 데서 굉장한 매력을 느꼈다. 현지의 풍취를 느끼며 여행 횟수가 늘어갈 때마다 더 많은 차를 구매했지만, 막상 집에서 내가 우리면 그 맛이 나지 않고, 떫기만 하다며 주변에마저 외면받기에 이르는데....(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