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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니 Feb 08. 2024

새 쪼리

그리고 낡은 버켄스탁



 도피를 준비하면서 돈이 정말 많이 새어나갔고, 그중 9할이 쇼핑이었다. 치앙마이 가서는 새로운 일상을 맞이하고 싶은 욕망이 컸다. 예를 들자면, 매일 오전 7시에 일어나서 러닝머신을 뛰며 하루를 건강하게 시작할 거니까 레깅스와 운동복은 필요하겠지? 거기는 햇빛이 세니까 캡 모자는 필수! 적어도 두 개는 있어야겠지? 캐리어에 들어가지 않는 짐들은 가방에 넣어 기내로 가져가야 될 텐데… 백팩이…없네? 혼자 다닌대도 여행은 여행이니까 사진에 잘 나올만한 컬러풀한 옷들도 필요하겠고,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박시 티도 필요한데 집에 있는 것들은 목이 늘어났으니까 어쩔 수 없이 새로 사야겠다! 무신사에서 무진장 세일하네? 아디다스 쪼리가 18000원? 4년 동안 버켄스탁 하나로 버텼는데, 이제 이것도 좀 오래 걸으면 쉰내가 나는 것 같으니 고무 재질로 된 쪼리도 괜찮겠다. 구입. 치앙마이에 도착하니 돈이 반 토막이 되어 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한 나의 물건들은 아직까지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있다. 여기 적응도 안됐는데 무슨 운동이냐며 갖은 핑계를 대고 미루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공수해 온 나의 운동복들은 새 옷 냄새를 고이 간직한 채 옷장 한편에 예쁘게 정리되어 있다. 백팩도 공항을 벗어나니 등에 땀이 차올라 일상에서는 메고 다니기 힘들 것 같고, 한국에 돌아갈 때 즈음 다시 만나려나. 특히 현재 가장 후회하는 것이 크록스를 포기하고 저 18000원짜리 아디다스 쪼리를 챙겨온 거다. 새 쪼리는 마치 예민한 고양이 같다. 보기에 너무 예뻐 반가운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보지만 날 세운 발톱으로 내 몸에 생채기만 내는 것이…



 기분 좋은 시작인 줄 알았다. 치앙마이에 도착 후 처음 맞는 아침이니 화장도 열심히 하고, 고데기로 머리도 말고, 새로 산 연핑크색 리넨 셔츠를 입고 화룡점정 아디다스 새 쪼리를 신고 활기차게 치앙마이와의 첫 만남을 고대했다. 숙소 밖을 나가니 사방에 푸릇푸릇한 식물들이 즐비했다. 나는 플로리스트다. 지금까지 매장에서 수두룩하게 판매했던 온갖 종류의 식물들이 노지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며 ‘이건 매장에서 30만 원에 팔았는데…,  와 이게 이렇게 잘 자란다고? 물 주기 조금만 놓쳐도 바로 죽는데…’ 하며 가지고 있는 지식들을 총동원하여 아는 체했다. 물론 말할 사람이 없어 홀로 떠들긴 했지만. 그렇게 얼굴을 알고 있는 반가운 식물들과 조우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카오쏘이라는 유명한 국수를 먹고, 동네를 돌아보고 싶어 정처 없이 거니는데 어느 순간 뭔가 잘못됐다고 느껴졌다. 태양이 내 생각보다 더 본인의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겨우 10분 걸었는데 화장은 다 녹아가고, 고데기로 예쁘게 살려 놓은 머리는 이미 힘을 잃은 채 양쪽 볼에 다닥다닥 붙어 매가리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새로 산 핑크색 리넨 셔츠는 등짝과 겨드랑이에서 점차 붉은 얼굴을 띄어가고 있었고, 쪼리는 쉴 새 없이 날 세운 발톱으로 발등을 공격했다.



 결국 나온 지 두 시간 만에 숙소로 돌아갔다. 셔츠는 단 두 시간 착용으로 세탁기에 들어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고, 남자친구가 챙겨준 상비약 파우치 안에서 소독약과 대일밴드를 꺼내 여기저기 상처 난 내 발을 치료해 줬다. 쪼리의 상처는 목욕할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다 까진 살점 안에 바디워시가 절대 들어가지 못하도록 검지에 샤워타월을 골무 마냥 두른 채 마치 갓 태어난 아기를 세수시키듯 세심하고 소중하게 발을 닦아주어야 했다.



 그 후 다시 새 살이 살짝이라도 돋아나면 아디다스 쪼리를 신고 패기 있게 외출 도전을 하고 있지만, 한 시간도 안 돼서 절뚝거리며 패배자처럼 씁쓸하게 숙소로 돌아오고 있다. 결국 두 달 후 버리고 가려했던 나의 오래된 버켄스탁만이 내 발에 맞춰 함께 걸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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