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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니 Feb 08. 2024

치앙마이 도피일기

쓸모를 찾아서

 


무작정 퇴사를 하고 치앙마이로 도피해 버렸다. 사유는 누구나 다 사내에서 겪는 스트레스 정도로 뭐 대단한 이유도 딱히 아니었지만 순간의 욱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퇴사 선언을 해버렸다.  조금만 더 참고 1년은 채울 걸 하는 아쉬운 마음도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이미 말을 내뱉은 이상 뚝심 있게 밀고 나왔다. 내년이면 앞자리 3이 되는 내 나이. 이렇게 인생을 한 번 더 배우고 있다.

#앞으로의 퇴사 매뉴얼 1. 퇴사는 최소 2주 이상 깊이 고민하기 2. 생리 기간에는 *아무 말*,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마라샹궈나 맛있게 먹기 3. 통장 잔고 보고 정신 차리기 4. 로또 당첨



  매니저님께 퇴사 선언을 하고 5분 뒤에 바로 치앙마이로 떠나는 비행기 표 예매를 했다. 코로나 때문에 근 2년 동안 마음껏 여행도 못했는데 이참에 공기 좋은 곳에서 잠이나 실컷 자는 생활이나 하자며 코로 뜨거운 숨을 쒸익쒸익 내뿜으며 항공사 어플로 들어가 예약했다. 당장 열흘 후 떠나는 비행기로. 그렇다고 내가 그동안 돈을 많이 모아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 달 일 한 월급이 다음 달 초에 들어올 거고, 티끌 같은 적금을 깨고, 그래도 이 정도면 두 달은 살지 않을까? 치앙마이는 물가가 싸다고 하니까… 혹시나 돈이 부족하면 (엄마는 이제 정신 좀 차리라며 뭐라고 했으니까) 남자친구에게 조금 빌려달라 하고, 정 없으면 하루에 한 끼만 먹고… 대책 없이 막연한 생각들로 일단은 저질렀다.



 남자친구와 3년 조금 넘게 만나는 동안 이렇게 오래 떨어지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남자친구와 함께하면서 아침에 커피를 사 오는 일이라던가, 맛있는 게 먹고 싶은데 돈이 없을 때 오빠 찬스를 외친다거나, 퇴근 후 집까지 가기 힘들 때 데리러 와달라고 또 오빠 찬스를 쓰거나 하며 마법같이 편안한 삶을 살아왔는데 이제는 내가 직접 모든 걸 해야 한다니… 일을 이렇게 다 저질러놓은 후 불현듯 모든 게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오빠 나 그냥 가지 말까?”

“아니야. 다녀와”

“응…”



 남자친구와 서로 아련하게 젖은 눈으로 공항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치앙마이로 향하는 비행기에 홀로 올랐다. 내일부터 당장 무엇을 할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탓에 나름 계획형 인간인 나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퇴사 후 떠나기까지 약 일주일가량의 시간이 있었지만 어느 단 하루도 치앙마이에 대해 제대로 조사해 본 적이 없었다. 매일같이 친구들과의 작별주(고작 두 달이지만)를 마시고, 그다음 날에는 술기운에 해롱대면서 오후가 지난 시간에 느지막이 일어나 해장하고, 남자친구 퇴근할 때쯤 만나 이제 두 달 동안 이곳도 못 온다며 동네 맛집 이별 순회를 다닌 덕분이다. 결국 한 일이라고는 두 달 동안 지낼 숙소 예약 하나 정도로 끝났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돈이 손에 조금이라도 쥐어지면 일상에서 벗어나 해외로 도피하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도전을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그때마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가끔은 자고 일어나면 중학생 때로 돌아가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마치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현재의 모든 기억을 다 가지고 과거로 회귀한다면, 얼른 비트코인을 사서……. 아니면 인생을 한 번씩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모든 인간들 목뒤에 리셋 버튼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도 삶이 처음인데 연습용 인생도 필요하지 않나?



 하지만 역시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 내 스스로 다른 세계 속으로 떠나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숨었다. 이 세계에서는 무얼 이루지 않아도 되었고, 그냥 좋은 것만 보고 맛있는 것만 먹는 생활만 필요했다. 잠시 머물다 떠날 사람이니 흔적도 남지 않고, 아무도 나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지 않으니 마치 약물 중독 마냥 마음이 힘들 때는 여행을 떠나버리는 여행 중독자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겉에서 보기엔 청춘을 잘 보내고 있는 척을 하며 나의 실패들을 여행으로 감추곤 했다. 여행을 하는 사람은 실패자같이 보이지는 않으니까.



 2년 전 태어나 처음으로 신점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신을 모신 지 몇 달 되지 않아 잘 맞춘다고 하는 친구의 추천으로 기대와 긴장을 품은 채 찾아갔다. 무당은 나를 보고 무엇이 궁금해서 왔냐고 물었다. “저… 제가 뭘 해야 성공할까요…?” 내 이야기를 들은 점쟁이는 쌀을 책상에 흩뿌렸고 방울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방 안에는 무거운 향냄새와 소름 끼치는 방울소리만 가득했다. 무당은 마치 옆에 누군가 있는 것처럼 소곤거리며 대화를 하다 흔들던 방울을 멈추고 매서운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할매가 너 미래가 아무것도 안 보인대. 그냥 하얗대”. 내 미래에 대한 얘기는 10초 만에 끝났고, 우리 가족 건강에 대한 이야기만 30분 넘게 듣고 나왔다. 신점은 원래 이런 건가….



 아직까지도 나는 무당의 그 말을 가슴에 고이 품고 있다. ‘내 미래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라… 그냥 하얗다는 건, 마치 도화지 같다는 건가? 그럼 나는 새하얀 도화지에 예쁘게 그림만 그리면 되는 걸까? 헤헤’ 하며 꿈보다 좋은 해몽을 가지고 있다. ‘그래, 나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데 무당이 어떻게 알겠어. 나도 어딘가에는 쓸모가 있겠지.’

 


 그리고 지금 나는 치앙마이에 왔다. 다른 세계에 다시 한번 도착했으니 나의 쓸모를 찾아보려 한다. 없으면 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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