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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니 Feb 08. 2024

적을 만들면 안 되는 이유

개미와의 사투

 날씨가 따뜻한 동남아를 여행하다 보면 벌레와의 만남은 감내해야 한다. 약 6년 전 필리핀 세부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어학원 기숙사에서 내 손바닥만 한 바퀴벌레를 처음 만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본 바퀴벌레라고는 독일 바퀴라고 옅은 갈색에 크기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 나라 바퀴벌레는 검은 갑옷을 입은 것 마냥 짙은 색에 더듬이는 왜 이렇게 긴 것이고, 다리에 나 있는 솜털들이 다 보일 정도로 본인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독일 바퀴들은 귀여워 보일 정도였다. 아직도 떠오르는 세부에서의 최악의 기억은 저녁을 먹고 학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걷는데 거리에서 파티를 벌이고 있는 바퀴벌레들 사이를 지나간 적이 있었다.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찍-, 찍-.  다행히 나는 운동화를 신고 있어서 ‘그냥 돌멩이를 밟는 거라고 생각하자’ 하고 부들거리는 몸을 이끌고 파티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뒤에 따라오는 어학원 동생은 불행하게도 슬리퍼를 신고 있었고, 하염없이 소리 지르며 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용감한 어떤 오빠의 등에 업혀 그 길을 건너올 수 있었다.



 이 무시무시한 경험 덕분에 치앙마이에서도 바퀴벌레와의 만남은 피할 수 없겠지라는 다짐으로 왔는데 바퀴보다 더 지독한 건 개미라는 걸 도착 일주일 만에 깨달았다. 바퀴벌레는 주로 야행성으로 저녁에 밖으로 외출하지만 않으면 만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이 개미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들어왔는지 아무도 모르게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갑자기 나타나 있다.



 개미와의 첫 만남은 도착 후 이틀 째였다. 그날은 용과를 사 온 날이었다. 숙소 식탁에 앉아 유튜브를 보며 용과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 팔꿈치에서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살짝 들어보니 용과에서 나온 검은깨가 떨어져 있었는데 그 깨가 마치 번지점프를 할 기세로 식탁 가장자리로 빠르게 뛰어가고 있었다. 알고 보니 자기 몸보다 몇 배나 큰 떨어진 용과 부스러기를 머리에 이고 가는 개미였던 것이다. 불쌍하지만 바로 검지로 꾹 눌러 죽이고 나는 다시 유튜브를 보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샤워를 하고 개운하게 침대에 누워 한국에서 들고 온 책을 눈을 반쯤 감은 채 읽는데, 갑자기 내 잠을 확 깨우는 따끔한 고통이 허벅지에서 올라왔다. 이불을 들추어 보니 개미 두 마리가 마치 아까 죽인 개미의 복수를 하는 마냥 오른쪽 다리를 야금야금 물면서 나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당장 일어나 다리를 털고 그 복수하는 개미들도 처참하게 죽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최소한의 결계로 한국에서 가져온 모기 퇴치 스프레이를 온몸에 떡칠하고, 침대에 사방팔방 뿌렸다.



  다행히 그날 밤은 나의 방어막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들은 다른 곳에서 철저하게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숙소에서 방 청소를 해준다. 도착 후 일주일이 된 시점이니 방은 이미 꽤 너저분했다. 입고 그대로 소파에 던져둔 옷들을 다시 옷장에 걸어두었고, 널브러진 화장품들을 서랍 속에 정리했다. 청소해 주시는 분이 거북하지 않도록 ‘이 방을 쓰는 사람은 깔끔하구나’ 하는 첫인상을 심어주고 싶어 어영부영 정리를 시작했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세탁기가 있어 그 앞쪽에 세탁할 옷들을 빨래 망 안에 넣어 모아두었다. 망 안에 들어있다 해도 속옷이 보이면 청소하시는 분도 민망할 테니 얼른 숨겨 두기 위해 빨래 망을 집어 드는 순간, 머리 털이 바짝 서는 스산한 기분과 함께 갈색 가루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치앙마이에 도착 후 처음으로 울고 싶은 순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다 갖다 버리고 싶었지만, 고작 두 시간 입은 새 셔츠와, 한 번 입은 새 박시 티와, 그리고 새로 구매해 온 속옷들이었다. 한 번 입고 버려지기엔 저번달에 열심히 일한 소중한 마지막 월급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빨래 망을 바닥에 내리쳤다. 10마리…, 한 번 더 내리쳤다. 8마리…, 다시 한번 내리쳤다. 13마리…….



 바닥에 수 백번 내리친다고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아 부들대는 손으로 빨래 망을 열었다. 내 속옷 안에는 수 십 마리의 개미들이 갑자기 일어난 지진에 대피하듯 우글거리며 방황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베란다 밖으로 냅다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돌돌이를 꺼내왔다. 옷에 먼지가 묻으면 떼려고 가져온 돌돌이를 개미들을 학살하는데 쓸 줄은 몰랐다. 빨래 망 안에는 일주일분의 속옷이 들어있었고 그 말은 즉 7개가 넘는 입었던 팬티를 다시 들추어 눈곱만 한 개미가 있는지 없는지 꼼꼼하게 봐야 하는 곤욕스러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빨래들을 오픈하고 개미를 다 죽이는 데만 약 1시간 반이 걸렸다. 이후 숙소 데스크에 청소 시 개미 살충제 좀 뿌려달라 말했고, 그 뒤로 아직 다시 만나지는 않았지만 몸이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간지러우면 냅다 그 부위를 때리는 습관이 생겼다. 또한 몸에 난 점이 개미 같고, 다리에 난 털이 개미 같아 보이는 지경이다. 나는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언젠가 그들에게 기회가 찾아오면 내가 죽인 백 마리가 족히 넘는 개미들의 친구들이 찾아와 내 온몸을 물어뜯어 나를 잠식할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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