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장 사태의 전말
태화전을 나와 정전으로 온 황제는 태의감의 어의들로 하여금 탕제 그릇과 약탕기를 조사케 하였고, 탕제의 성분을 재검토하라 일렀다. 그런 한편으로는 연향이 먹은 음식을 만든 숙수와 여관들, 그를 나른 내관들, 태화전을 출입하였던 모든 이들을 잡아들이라 명하였다. 그 누구도 의심의 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약탕기를 가져갔던 어의가 다급하게 정전으로 돌아와 황귀비가 반하가 들어간 탕약을 마셨노라고 고하였다. 반하는 구토를 달래는 데 사용되는 약재로 독은 아니었으나, 회임을 한 자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반하가 들어간 탕제를 마시고 옷깃이 흥건할 만큼 하혈을 심하게 하였다면 유산은 필연적이었다.
황제의 명으로 국청이 서고, 달포 안에 반하를 처방받았던 모든 이들이 추포 되었다. 우승상의 주도 하에 국문이 시작되었다. 화를 모르던 황제의 노여움은 북풍한설보다 차고 매서웠다. 죄가 있든 없든 국청에 끌려 나온 이들은 모두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그러나 국청의 결과 밝혀진 사태의 전말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간단하였다. 배앓이를 하던 여관 하나가 태의감에서 반하가 들어간 약첩을 처방받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연향에게 올릴 탕제를 엎은 의녀가 태의감에 들렀다가 여관의 약첩을 연향의 것으로 착각하여 잘못 가져간 것이었다.
반하는 독이 아니었기에 기미를 맡은 시녀에게는 반응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당일 태의감에 당직을 섰던 어의와 관료들, 시비들은 관리 소홀로 줄줄이 파직당하였고, 연향을 돌보았던 어의와 탕약을 엎었던 의녀는 황손을 잃은 책임을 물어 삭탈관작하고 공노비로 삼았다. 이틀 만에 깨어난 연향이 고의가 아닌 실수인데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눈물로 호소한 까닭이었다. 연향의 유산과 관련한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정작 회민제를 더욱 분노케 한 일은 탕제 사건 이후에 일어났다. 탕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국청이 닫히자, 조당에서 황손을 잃은 황귀비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새로운 공론이 일어난 것이다. 황제는 즉위 이전부터 연향 외의 후궁은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으나, 가문의 여식을 황제의 후궁으로 만들 절호의 기회를 욕심 많은 무리들이 놓치려 할 리가 없었다.
한 번 유산을 하였으니 몸을 회복하여 재차 황통을 잇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인즉 황제께서 간택령을 내려 내명부를 키우고 후사를 든든하게 하여야 한다는 상소부터 본디 황손을 잃은 후궁은 내명부의 봉작을 박탈하는 것이 관례이니 폐비는 차치해 두고서라도 내년 봄 입후는 불가하다는 상소까지 실로 가관이었다.
이 사건에서 연향은 엄연히 피해자였고 황손을 잃은 것과 관련하여 어떠한 잘못도 하지 아니하였으나, 아직까지도 운신이 어려울 만큼 회복이 더딘 것은 수태가 불가할 정도로 몸이 망가진 증좌이니 황통을 잇지 못하는 후궁은 폐비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까지 흘러나왔다. 들불처럼 일어난 조당의 세는 연향을 물어뜯지 못하여 안달이었다. 황제는 조당의 가당치 않은 요구에 대로하였지만, 지난 황귀비 책봉의 에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였던 조정 대신들은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고 팽팽하게 황권에 맞섰다.
“폐하, 심신이 지쳐 보이십니다.”
“공연히 일로 마음 쓰지 마라. 그대의 회복이 짐에겐 가장 중요하다.”
황제는 두 팔을 뻗어 연향을 품에 안았다. 품 안에 들어찬 온기가 지친 심사를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파리한 안색으로 피를 흘리며 혼절하였던 연향을 떠올리면 지금도 정신이 아찔하였다. 이 정도라도 회복하여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불민한 신첩을 지키고자 폐하께서 심한 고초를 겪으시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신첩의 마음은 헤아리지 마시고 폐하께서 하셔야 할 일을 하소서. 신첩 비록 전하의 귀한 아기님을 잃어 천고에 지우지 못할 죄를 지었사오나 아직은 폐하의 비이고, 백성들의 어미입니다. 모두가 힘을 합하여 백성들을 위한 일을 도모하여야 할 조정 신료들이 고작 신첩의 일로 인하여 세가 갈라져 싸우며 귀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라 하겠나이까. 그 가운데서 만백성의 어버이이신 폐하께서 고통받으시는 것이 신첩은 가장 견디기 어렵사옵니다. 하오니, 제발.”
“아이를 잃은 것도 아이를 낳은 것 이상으로 고되고 아픈 일일진대 그 모진 고통을 겪은 네가 어찌 스스로를 할퀴는 소리를 재차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이냐.”
연향은 가만히 황제를 바라보았다.
“정녕 모르십니까. 폐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셔서, 그러한 폐하를 연모하여서 그렇습니다.”
연향은 황제가 오기 전 저를 찾아왔다 간 아비를 떠올렸다. 대수협은 조정의 분위기를 가감 없이 연향에게 전하였고, 이미 조정의 중론이 연향과 황제에게 불리하게 형성되었으며, 그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 되었기에 이 사태 속에서 황제가 연향 외에 더 이상의 여인은 없다는 약조를 지키려면 잃어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설명하였다. 하여 그는 이 일에 한하여 딸인 연향의 편에 서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저들이 원하는 것을 던져주어 연향의 자리를 지키고, 백성을 위한 힘을 만들겠다 하였다. 그러니 연향 또한 황제와 태예를 위한 선택을 해달라고 하였다. 기주의 현주답게, 황제의 총비답게, 이 나라의 국모답게.
그 결단이 고작 사랑하는 이의 곁에 다른 여인을 붙여주는 것인 것이냐고 연향은 반문하고 싶었다. 연모하는 마음 하나 지키지 못하는 것이 사내들의 정치냐고 성을 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 모든 분노와 회의 앞에 저 아닌 여인은 영영 없으리라 맹세해 주었던 황제가, 백성들을 아끼는 그대가 나의 비가 되어 참으로 좋다고 속삭여주었던 승명이, 날 것 그대로의 저를 온전히 이해해 주었던 사랑하는 아무개가 있었다.
“나라의 극존께서 작고 하잘 것 없는 신첩을 항시 크고 넓게 헤아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연향아.”
연향은 울지 아니하였다. 고개 숙여 눈물 흘리는 대신에 그녀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애타게 연향을 불렀다.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라는 듯이. 간곡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었다.
“연향아.”
“지금 이렇듯 신첩의 다친 마음을 먼저 어루만져 주시는 폐하라서 드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신첩 또한 폐하를 지킬 수 있게 허락하소서.”
“대승상이냐. 네게 그런 말을 하게 만든 이가 호번왕인 것이냐?”
그녀의 아름다운 눈망울에 실린 확고한 의지를 읽은 황제의 얼굴이 차츰 차갑게 굳어졌다. 연향은 황제가 어떤 심경일 때 이러한 얼굴을 하는지 알았다. 그것은 황제로서, 한 나라의 군주로서 무언가를 결심할 때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이번 주에는 김장 주라서 정신이 없어서 오늘이 연재일인 줄도 몰랐습니다. 주말까진 내리 바쁠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다음편은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기다려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