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脈, 衇, 霡 본 1부 황실의 꽃 27
27장 암투의 손길
본 1부 황실의 꽃
27장 암투의 손길
“무엇을 물리치지 말라는 것이냐?”
기척도 없이 들어선 황제의 음성에 두 여인은 깜짝 놀라 일어섰다.
“황제 폐하를 뵙나이다.”
“폐하를 뵙나이다.”
회민제는 황급히 예를 올리는 채란을 지나쳐 그대로 연향에게로 향했다.
“무리해서 일어날 필요 없다고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어찌 그리 고집이 센 것이냐.”
혀를 찬 황제는 연향의 허리를 감싸고 조심스레 침상 위에 그녀를 앉혔다. 몸을 전혀 가누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대하듯 조심스러운 손놀림이었다.
“송구하옵니다.”
“송구할 것도 허다하다. 오늘은 어디 불편하거나 아픈 데는 없었느냐?”
“저 아이가 잘 돌보아 주어 편히 지냈습니다.”
연향의 말에 비로소 회민제의 시선이 채란을 향했다. 회민제는 채란이 연향 곁에 있는 것이 과히 탐탁하지 않았다. 그녀를 대할 때면 기주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과히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모후의 처소에서 처음 보았을 때에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모후가 영리하고 참한 아이가 들어와 지내기 쾌적하여졌다 하기에 내버려 두었을 따름이었다. 사람이야 누구든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고, 채란이 헛된 욕심을 버리고 성실히 살아가기를 다짐하였다면, 신전에 귀의하겠다고 하던 이가 황궁의 여관이 되겠다고 나타났다 하여 황제인 그가 나서서 무어라 할 계제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연향의 곁에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연향은 황제인 자신의 총비였고, 그녀의 수태는 나라의 큰 경사였으나 그 사실을 꺼리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터였다. 구중궁궐에 겹겹이 저의 사람으로 둘렀어도 흉수란 어디서든 뻗칠 수 있는 법, 황제는 제가 심지 아니한 채란을 자연히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몇 개월을 지켜봐도 채란은 그저 성심을 다하여 연향을 돌볼 뿐 다른 어떠한 조짐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연향도 채란의 수발이 가장 편하다며 거듭하여 그녀를 칭찬하고, 하루가 다르게 몸이 불어 무거워져 가는데도 예전과 달리 식욕도 되찾고, 얼굴과 팔다리의 부기도 빠지고, 진맥을 하는 어의 얼굴도 평안하여 연향이 한결 수월하게 지내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자 채란을 향한 황제의 모난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네가 수고가 많구나. 내 너의 노고를 잊지 않고 큰 상을 내릴 것이니 황귀비가 무사히 해산할 수 있도록 끝까지 잘 돌보아 다오.”
“응당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있을 뿐인데 어찌 상을 바라리까. 소인 끝까지 마마를 성심을 다하여 모실 것이옵니다.”
채란은 나부죽이 절을 하며 답하였다. 자신을 향한 황제의 눈빛이나 음성이 예전보다 부드러워졌음은 채란도 느끼고 있는 바였다. 임시로나마 황태후전에서 후궁인 황귀비전으로 소속이 바뀌는 것은 강등이나 다름없는 일인데도 불평 없이 받아들인 데에는 이로 인하여 채란이 노리고 있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채란은 자신을 향한 황제의 경계와 적의를 지우고 싶었다. 태화궁으로 와 연향의 곁에 머물면서 그녀가 확실히 알게 된 바는 두 가지였다.
황제에게 연향은 그저 정략으로 맞아들인 후궁 같은 것이 아니었다. 연향과 황제 사이에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특별한 유대가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채란은 황제의 마음을 얻는 것을 포기하였다. 황제는 연향을 사내로서 아끼고 있었고, 그런 이유에서 그는 다른 여인들에게 무심하였으며, 채란 자신을 경계하였다. 그것은 그녀가 황제와 연향 사이를 파고들려고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주에서의 섣부른 접근은 채란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치명적인 실수로 작용하였다. 황제는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아니하는 만큼 한 번 내어준 곁붙이에게 더할 수 없이 충실한 사내였다. 그러하기에 황제는 연향의 자리를 밀어내려 하였던 채란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황제의 적의와 경계가 연향에 대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면, 그를 지우는 것도 연향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제 몸처럼 아끼는 연향을 헌신적으로 돌보아, 그 안에 깃든 자신에 대한 반감을 지워야 그녀에게 또 다른 기회가 열릴 터였다. 하여 채란은 연향 옆에서 머무는 동안 스스로 여인이기를 지워버렸다. 그저 연향의 안락만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이기를 자처하며 그녀만을 생각하고 그녀를 위해 움직였다. 그 앞에서 여인인 자신을 버리자 거짓말처럼 황제의 적개심이 잦아들기 시작하였다.
“그 말을 믿겠노라.”
황제는 그 말을 끝으로 바로 연향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은 정감으로 가득하였고 그녀의 일상을 챙기는 옥음은 우는 아이를 달래듯 다정하였다.
“탕제는 마셨느냐?”
“아직 아니 들었나이다.”
“어찌 아직인 것이냐. 그대를 돌보는 어의가 혹여 소임에 태만하더냐?”
“아니옵니다. 탕약을 가져오던 의녀 아이가 문턱에 걸려 넘어져 다시 달이고 있다 들었습니다.”
잔잔한 얼굴로 묻고 있으나 황제가 자신과 관련된 일에 소홀한 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게 된 지라 연향은 재빨리 답하였다. 저를 돌보느라 몇 달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고생하고 있는 이들에게 공연한 화가 미치게 할 수 없었다.
“마마, 탕약 드실 시간이옵니다.”
때마침 의녀 하나가 탕제를 가지고 들어왔다. 소반에는 황제의 명에 따라 은수저와 탕약과 꿀에 묻혀 말린 대추가 함께 나왔다. 황제의 시선을 받은 연향의 지밀 시녀가 나와 은수저로 탕약을 조금 떠서 먹어본 뒤 대추를 집어 씹었다. 기미를 끝낸 시녀가 조용히 뒤로 물러나자 황제는 그제야 탕약을 들어 연향에게 내밀었다. 약을 조제할 때에는 황태후 윤씨의 입회 아래 태의감의 어의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처방하고, 달이기 전에는 꼭 처방된 약이 맞는지 확인케 하였다. 그리고 탕약이 나오면 꼭 기미를 거치게 하였다. 총비를 향한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는 황제는 늘 그렇듯 진중하고 치밀하였다. 황제가 건네준 탕약을 거의 다 마신 연향에게 말린 대추를 내밀었다. 대추를 받으려던 연향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아랫배를 감싼 채 신음을 흘렸다. 기미를 한 시녀도, 탕제를 들여온 의녀도 희게 질렸다.
“어의를 들라 하라!”
조당에서조차 좀처럼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는 황제가 다급하게 어의를 불러들였다. 연향은 황제의 품속에서 몸을 옹크린 채 끙끙 앓았다. 다급한 발걸음이 이어지고 연향의 내실 안으로 대기 중이었던 어의가 뛰어 들어온 것과 황제인 조효가 옷깃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끼고 시선을 내린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치맛단을 물들인 붉은 피가 황제의 옷깃을 적시고 흘러내려 바닥에 고이고 있었다. 하혈이라니, 황제의 두 눈이 고통과 분노로 일렁였다.
“네가 올린 탕제를 마시고 이리되었다.”
황제는 사태의 원인을 추궁하지 아니하였다. 여느 때와 같이 조용한 음성으로 사실을 적시하고 현 상황에서 최선의 대처를 명하였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어의를 향한 황제의 얼굴은 야차를 방불케 하리만큼 험악하였다.
“잊지 마라. 황귀비의 안위가 최우선이다. 당장 하혈을 그치게 하고 고통을 멎게 하라. 이 자리에 있는 누구든 황귀비가 쾌차할 때까지 이 궁을 나서지 못할 것이다. 사태에 대한 책임추궁은 그 이후에 하겠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황제의 분노는 황귀비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죽이겠다고 윽박지르는 것보다도 살벌하였다. 금군을 불러들여 연향을 진맥 하는 어의와 그녀의 시중을 담당하였던 이들을 지키게 한 황제는 전속시종 왕오로 하여금 연향이 먹다 남긴 탕제 그릇과 대추를 담은 소반, 약을 달인 약탕기를 챙기라 하명하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올라온 탕약과 음식이 드나든 모든 곳을 추후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출입지 못하도록 지키라 명하고는 태화전을 나섰다.